[교계이슈] 한국교회 목사 열전 (2) 평양교회 개척자 한석진 목사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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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생 중 제일 먼저 예수 믿고 신앙 생활해

한국교회 신문 사상 초대 사장으로 선출돼 

1907년에 75명의 학생이 1, 2, 3, 4, 5학년에 나뉘어서 공부했고 동년 6월 20일 한석진은 서경조, 양전백, 길선주, 방기창, 이기풍, 송인서와 함께 평양 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됐다. 1907년 9월 17일 조선예수교 장로회 제1회 독 노회에서 한석진은 함께 졸업한 6명과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한국 장로교 역사상 처음 임직식을 갖게 됐고, 한석진 조사는 첫 번째 7명의 목사 중 한 사람이 됐다. 이 졸업생 일곱 명 중에서 제일 먼저 예수 믿고 신앙 생활한 사람은 한석진 목사였다.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노회가 조직됐다. 노회장에 마펫 목사, 서기로 한석진 목사, 회계는 이길함(李吉咸-Graham Lee) 선교사가 선정됐다. 이때부터 한석진 목사는 계속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 역사를 기록하는 소임을 맡아 성실하게 감당했다. 이 같은 역사적 대한예수교장로회 독 노회의 설립에 임하여 최초 7인 목사 중에 대표인 한석진 목사와 길선주 목사가 함께 기초한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 회록 서문 전문을 기록했다.

1909년 9월 제3회 조선예수교 독 노회는 평양 신학교에서 모이고 ‘교회보(敎會報)’ 발행을 계획했다. 신문 위원회 조직에서 한석진 목사가 8명의 위원 중 한 사람이 됐고 9월 7일 한석진 목사가 신문사 사장으로 선출됐다. 한석진 목사는 한국교회 신문 사상 초대 사장이었다. 그런데 일본 동경에 있는 한국 유학생들의 예배 모임이 한국교회에서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제3회 총회에 정식 안건으로 상정됐다. 여기서 한석진 목사를 1개월간 파송하여 교회 설립을 돕도록 했다. 

이때 독 노회가 요구했던 일본 선교사의 조건으로 1) 서구화된 일본문화를 상대할 만한 인물 2)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으로부터 유학생들을 보호할 수 있는 민족의식이 강한 사람 3) 한국보다 먼저 기독교를 받은 일본 수도에서 활동하려면 인격이 탁월한 인물 4) 앞선 문명을 배우러 온 유학생들이니 그 지식에 있어서 탁월한 인물이어야 했다. 인물을 선정하기 위하여 정사 위원회에 위촉했으며 동 위원회는 숙의한 끝에 한석진 목사를 이에 적합한 사람으로 지명했다.

한석진 목사는 이때 예수교 회보 사장으로 선임되어 장천교회를 떠나서 단신 서울에 와서 신문의 창간을 준비 중이었다. 일본은 명치유신(明治維新) 이래 서구문화를 받아들여서 크게 발전됐고 그 실력을 뒷받침하여 우리나라를 강점하려는 야욕이 노골화되어 보호조약을 구실로 내정간섭에서 병탄으로 급진전하는 때이므로 동경 유학생의 위치가 미묘한 데다가 적어도 동경에서 굽히지 않는 지도자가 되려면 그 인격에 있어서나 지식에 있어서나 탁월한 인물이 아니어서는 안 되겠으므로 독 노회는 신문사 사장의 중임을 맡은 한석진 목사를 일시나마 동경에 파견을 결정했다. 1909년 예수교장로회 노회 제3회 회의록은 그 사실을 자세히 기록했다.

1909년 9월 노회를 마친 후 10월 한석진 목사는 동경으로 갔다. 한석진 목사는 마펫 목사의 소개로 동경 주재 헵번(J.C.Hepburn) 선교사를 만났으며 일본인 우에무라(植村正久) 목사의 알선으로 셋집을 얻어서 처음으로 한국인 예배를 시작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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