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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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보이스 타운 < 3> 

난지도 삼동 소년시 ⑦

삼동소년시, 철저히 지켜진 삼권분립

기도생활 속 노동의 신성함 강조

“범사에 감사”마음가짐…

그리스도 기본 덕목

고아들 아픔 생각해 ‘형님’ 명칭 사용

다음은 ‘소년시장 취임식’이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된 1955년 5월 15일자 ‘한국기독공보’의 2단 짜리 기사이다.

한국동란으로 전쟁고아가 된 어린이들이 한 섬에 모여 한 시를 구성하여 자기들의 자치제로 움직이고 있는데, 지난 12일 제3대 시장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동일 한국 기독교청년회 연합회 총무 신흥우 박사, 유영모 선생, 함석헌 선생 외 내빈 다수 참석한 가운데 성동고등학교 밴드 주악으로 시작되었다.

이날 서울 중앙 YMCA 현동완 총무는 새로 취임되는 시장 김용호(17세) 군에게 메달과 행운의 열쇠를 전하고 신앙 생활을 게을리하지 말라,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리라는 훈시와, 이에 Y 연합회 총무 신흥우 박사는 지금부터 책임과 권력이 중한 것을 알아 으뜸되는 시장이 되기를 바란다는 축사가 있었다.

그리고 답동 부녀관을 협조한 미 8군 매크락키 종군목사에게 기념품 증정이 있은 다음 시민들의 사열식과 축하 운동회도 성대히 거행되었다.

“소년시 시장 당선은 일반사회의 대통령 되기만큼이나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 얘기를 하기에 앞서 제주도 한국보육원에 있던 내가 어떻게 난지도 형님에게로 가게 되었는지부터 말씀드리지요.”

김용호의 말이다. 황광은 형은 한국보육원을 떠나며 그에게 한마디 말도 없었다. 그러나 황광은 형이 없는 제주도는 그에게 아무 매력이 없어 무조건 나와 서울로 올라왔다.

삼류 악극단을 따라다니기도 하다가 그것도 신통치 않아 시청 옆에 위치한 기생집의 심부름꾼 노릇을 했다. 그런 어느 날 그는 심부름을 나갔다가 우연히 시청 앞에서 황광은 형을 만나게 되었다.

“형님은 내게 안부를 묻더니 쪽지를 주더군요. 원래 형님은 말로도 할 수 있는 일을 쪽지로 주곤 하는 취미가 있거든요. 그 쪽지에 난지도 보이스 타운 약도가 있었고, ‘즉시 오라’는 말이 적혀 있었어요.”

그래서 김용호는 난지도 소년시의 시민이 되었고, 다음해에는 시장으로 입후보하게 되었다. 그때 세 명이 시장으로 입후보하게 되었는데, 그중에는 별명이 ‘능구렁이’라는 덩치 큰 소년이 있었다. 그는 다른 한 명의 입후보는 협박으로 사퇴시키고, 김용호에게도 사퇴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고 협박하더란다.

“그 협박에 응하지 않았더니 밤에 나를 납치해다가 한강 모래사장에 파묻고 협박하더군요. 그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당선된 소년시장 자리입니다.”

김용호가 제3대 소년시장에 당선되자 황광은 형은 ‘축하한다’는 쪽지와 함께 이른바 ‘달라 시계’를 선사하더란다. 비록 값싼 시계였으나 김용호로서는 처음 가져보는 시계였기 때문에 지금도 그 감회를 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김용호 씨는 지금도 그 내용을 알지 못하고 있지만, 그때 황광은 형은 아내 김유선 여사의 결혼 금반지를 팔아서 그 시계를 샀다. 훗날 그 일에 대해 김유선 여사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도 그렇게 한 데 대해 전혀 후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때 철이 없었다는 생각은 듭니다. 결혼 기념 반지를 그렇게 없애 버렸으니 말입니다.”)

소년시의 운영

난지도 삼동 소년시 제3대 시장을 지낸 바 있는 김용호 씨는 그 소년시를 가리켜 “그것은 규모 있는 소년 공화국으로서 당당히 국가 행세를 했다”고 회고하였다. 그를 통해 알아본 삼동 소년시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편성 : 고아 소년들로 이루어진 자치제.

인구 : 수시로 변동이 있었으나 평균 200명.

면적 : 난지도의 10만 평.

조직 : 시의 대표로 시장이 있고, 그 아래 부시장, 사령관, 8개 부처의 장관, 10명으로 구성된 시의원, 재판소가 있었다.

삼권 분립이 철저히 지켜진 것이 삼동 소년시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시장은 삼동 소년시의 대표자로서 시 행정의 제반 사무를 관장한다. 부시장은 시장을 보좌하며 시장 유고시 시장직을 대행한다. 사령관은 국가의 내각으로 치자면 국방부 장관으로서, 그 안에는 헌병대와 경비대를 두었다. 헌병대는 소년시 안의 질서를 유지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경비대는 소년시 외부 세력의 침입이나 간섭을 통제하고 방어한다.

8개 부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생활부, 상공부, 재정부, 농림부, 체신부, 문화부, 보건부, 인사부. 각 부처의 책임자는 장관이라 불렀다.

삼동 소년시의 시의원은 10개 부락의 촌장으로 구성되었다. 10개 촌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희망촌, 샛별촌, 신앙촌, 영광촌, 행화촌, 평화촌, 신생촌, 동화촌, 학생촌, 장형촌.

삼동 소년시에는 독자적인 화폐도 있었다. 화폐는 ‘평’과 ‘화’로 단위를 이루고 있었는데, 10평이 1화가 된다. 한 시간 노동을 한 삯은 보통 1화였고, 초콜릿 한 개의 값이 5화였으니, 과자값은 퍽 비싼 편이었다.

황광은 원장은 기도 생활을 하며 소년시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소년시 시민들에게 항상 입버릇처럼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하곤 했다.

“아무 누구도 의지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라. 노동의 값을 치르지 않고 너희들이 어찌 숨을 쉬고 또 먹고 마시고 할 수 있겠느냐. 땀 흘려 얻은 수확으로 밥을 먹는 기쁨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너를 항상 돌보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여라.”

또한 황광은 원장은 언제나 “오며 감사, 가며 감사, 있어 감사”라 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가짐을 늘 강조하였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본되는 덕목이요, 그와 같은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황광은 원장은 소년시 시민들로 하여금 자기를 부를 때 ‘선생’이 아닌 ‘형님’이라 부르게 하였다. 고아원에서는 원장 선생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아버지라 부를 때 고아인 소년들이 느낄 슬픔을 생각해서 그렇게 하였다. 실상 황광은 원장은 소년시에 있으면서 자기 아이들을 한 번도 품에 안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이 부러워하게 될까봐 조심한 것이다. 그는 또한 소년시 시민들이 자기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 하여 ‘형님’이라 부르게 함으로써 고아들로 하여금 혈연적인 친숙감도 가지게 하였다. 삼동시 시민들로서는 ‘형님’이 많게 마련이어서 황광은 원장은 형님 중에도 ‘큰형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려졌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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