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50주년 기념] 개항장길에서 만나는 근대 기독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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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순례길 – 복음의 출발점 인천>

본 교단 총회 순교자기념주일(6월 11일)을 기념하고, 본보 창간 50주년기념 특집으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복음의 출발점’을 찾아보았다. 특히, 인천 일대와 대한민국 기독교 근대 문화유산을 연구하고, 현재 씨채널 ‘성지가 좋다’(국내편)에 출연하고 있는 이종전 박사의 기고문을 통해 오늘 이 땅에 순수한 복음이 들어온 140여 년 전 부활절(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 들어온 미국 북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와 미국 북감리교 아펜젤러 선교사가 조선 땅에 도착해 한국교회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인천의 순례길을 돌아보며,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복음의 정신이 재무장되고, 신앙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길 바란다. (사진출처 : 인천관광공사) <편집자 주>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

오늘의 인천이라는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한국의 근대사와 함께이다. 조선의 몰락이 시작하던 때, 즉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던 조선의 쇄국정책은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강요된 문호를 개방해야만 했던 그 시점인 1883년 제물포항이 개항되면서 오늘의 인천이라는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현재에서만 보면 인천은 인구대비 서울, 부산에 이은 3대 도시일 만큼 크다. 그렇지만 불과 1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전혀 다르다. 당시 인천은 현재 월드컵 문학경기장이 있는 주변에 형성된 아주 작은 고을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현재 인천항(당시 제물포)이 있는 곳은 작은 어선들이 정박하는, 어떤 항만시설도 없는 그런 포구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강요된 것이지만 역사의 전환점은 일본, 미국, 영국 등과 외교관계를 체결하면서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가 필요했기 때문에 제물포가 유력한 항구로 조성되면서 오늘의 대도시가 될 수 있었다. 물론 그에 앞서 신흥 제국주의 국가로 등장하던 일본이 한반도와 대륙을 지배하고자 하는 야욕을 감춘 채 조선을 그 교두보로 만들기 위해서 일본 민간인들을 먼저 한반도에 진출시켰고, 그 기반 시설을 제물포에 만들기 시작하면서 항구로서 기능을 하게 하면서 인구가 집중 되었다.
그곳이 현재 내항이 자리하고 있는 자유공원 아래 관동과 신포동, 사동, 항동, 송학동, 내동 일대를 중심으로 인천의 도심을 형성하게 되면서 오늘의 인천이라는 도시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인천은 전혀 다른 대도시로 발전하면서 서해의 도서들과 강화도까지 포함한 광역시로 인구 300만 명의 도시가 되었다.

| 개항장길

제물포항은 개항 초기부터 서양의 문물이 한반도에 들어오는 거의 유일한 길목이었다. 따라서 선교 초기의 선교사들이 입국해서 이 나라에 처음 발을 내디딘 곳도 제물포항이다. 그러니 선교사들의 입국과 더불어 초기 한국의 선교역사를 찾아보기 위해서는 당시 제물포항이었던 곳으로부터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걸었던 그 길을 찾아가는 것은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그 길은 선교사들은 물론 조선에 입국해서 서울까지 가기 위한 모든 외국인들이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19세기말 제물포로가보자.

1883년 제물포항이 개항되면서 근대 개항 거리가 조성되었다. 현재는 인천 개항장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탑

이 기념탑은 1985년 한국선교100주년을 맞이해서 건립했다. 선교의 기점을 언제로 할 것인가 하는 이견들이 있지만, 1885년은 선교사 비자를 받아서 공식적으로 입국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한 해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1885년은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입국한 것을 기점으로 하는 선교를 말하는 것으로써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기점이다.
따라서 1985년 한국선교100주년을 맞아서 기념대회를 위한 조직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서울중심의 100주년기념행사를 하였다. 한국선교100주년기념사업으로는 가장 많이 알려진 여의도광장에서 열렸던 100주년기념성회였다. 약 120만명이 모인 대규모집회는 지구상의 종교 집회의 기록들을 모두 갈아치웠을 정도였다. 또 하나는 용인에 건립한 순교자기념관이다. 그리고 여기에 건립된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탑>이 그것이다.
이 탑이 서 있는 곳은 당시 제물포항에서 선교사들이 하선(下船)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탑 바로 옆에 있는 구 올림포스호텔이 자리하고 있는 언덕 아래가 처음으로 선교사들이 대형선박에서 내려 작은 전마선으로 갈아타고 내렸던 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따라서 그곳과 가장 인접한 공간이 지금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탑’이 세워진 자리이다.
이 탑은 인천의 교회들의 헌금과 100주년기념대회 조직위원회의 지원, 각계의 모금으로 건립되었다.

1985년 한국선교 100주년을 맞이해서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 탑을 건립했다.

| 대불호텔

개항장길을 따라서 걷다보면 인천중부경찰서 앞에서 건널목을 건너 자유공원으로 향하게 된다. 가장 먼저 만나는것이 차이나타운을 알리는 패루인데, 그곳을 지나 공원으로 오르는 길(이 길은청나라와 일본 사람들이 살던 지역을 나눈 租界임)로 가면, 우측에 붉은 벽돌로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건물이 있다. 물론 현재의 건물은 2018년에 복원된 것이지만, 옛 모습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순례자들에게는 목마른 쉼터가 되어주고 있다.
이 호텔이 한국 최초의 호텔인 것은1887년 일본인 호리 히사타로(屈久太郞)가 건립해서 영업을 했기 때문이다.
이 호텔의 초기 영업은 현재의 건물과 같은 양식이 아닌 2층 목조건물이었는데, 1887년 벽돌조 3층 건물로 새롭게 단장하면서 호텔영업을 본격적으로 했다. 개항 초기에 제물포에 도착한 외국인들이 서울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실제로 서울까지 가는 신작로조차 없었기 때문에 초기 선교사들은 제물포에서 서울까지 가는 길에 담긴 고난사를 기록하고 있다.
당연히 초기 조선에 입국한 언더우드나 아펜젤러도 이 호텔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딱히 제대로 된 숙박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99년 일본에 의해서 경인선 철도가 놓이면서 당일로 서울까지 갈 수 있는 수단이 생기게 되었고, 이어서 1904년 제물포항이 러일전쟁의 전장이 되다보니 외국인 이용자들이 급감하게 되면서 호텔 영업이 어렵게 되었다. 1919년에 중국식당(中華樓)이 인수해서 북경요리 전문점으로 운영을 하다가 1970년 폐업을 했다. 그 후 임대사업을 하다가 1978년 철거하여 나대지로 있었던 곳에 2018년 지주이기도 한 당시 인천시 중구청장이 오늘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일반인들에게 개항장 시대의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오픈하고 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대불호텔을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는 대불호텔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극동방송 스튜디오

대불호텔을 지나 조계길 계단을 따라서 올라서면 바로 OO웨딩스튜디오가 있다. 현재는 웨딩사진을 촬영하거나 촬영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극동방송국이 1967년 서울 마포구 상수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모든 프로그램을 제작하던 곳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건물의 역사를 모르기에 그냥 지나친다. 하지만 알고 찾는다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복음전파, 특히 대 공산권 선교의 첨병역할을 한 초기 극동방송국 심장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건물은 극동방송이 1961년 3월에 기공을 하여 1962년 7월 1일부터 이곳에서 방송을 했다. 극동방송이 이곳으로 연주소를 옮기게 된 것은 연주소, 송신소, 선교사 사택이 한 곳에 있는 것이 효율성은 있지만, 연주소와 송신소가 함께 있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었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학익동 바닷가에 자리한 방송국의 위치가 선교사들에게는 여러 가지로 불편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방송의 역량이 커지면서 스튜디오가 턱없이 부족했던 것도 한 요인이 되었다. 이때 부터 방송제작은 북성동에서 하고 학익동에는 송신소 기능을 담당했다.
이 연주소 건물은 왓손(Tom Watson) 선교사가 부인의 이름을 따서 캐더린(Katheryn Watson) 기념관으로 지었다. 그녀는 왓손 선교사와 함께 내한하여 사역을 돕다가 1959년 10월 30일 39세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별세했다. 따라서 왓손은 북성동 연주소를 지어서 그녀의 기념관으로 명명하게 되었고, 그는 이 건물을 짓기 위해서 기금을 마련하는 일을 했다. 이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막대한 예산과 기술이 필요했다. 총예산은 당시 화폐단위로 2억 2천여만 환이나 들었다(송신설비 1억2천 만환 포함). 또한 건축기술자가 미국으로부터 와서 직접 시공을 담당했다. 이 연주소의 규모와 설비는 대략 사무실이 13개, 스튜디오가 3개, 주조정실과 부조정실이 각각 마련되었다. TEAM선교회는 이 건물을 마련하기 위해서 당시에 약 10만 달러의 부채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극동방송은 1962년부터 1967년까지 이곳 북성동 연주소에서 방송을 했다.

극동방송 옛 사옥과 사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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