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향기] 김용덕 장로(금호중앙교회, 굿타이딩스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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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중국 그리고 동북아를 통한 선교 사역, 회고록에 담아

“30년 사역의 자료들, 사역자들의 참고서이자 지침서 되길 원합니다”

김용덕 장로(금호중앙교회, 굿타이딩스 이사장)

김용덕 장로(굿타이딩스 이사장)는 그의 30년 민족복음화 사역을 담은 회고록을 대담집과 화보집으로 엮어 23일 코리아나호텔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출간된 두 권의 책에는 중국과 북한에서 추진한 선교 사역과 그곳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가 글로 담겼다.

“교회사를 연구하는 분들과 선교학을 가르치는 학자들이 간혹 찾아와 그동안의 관련 자료들을 책으로 남겨두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하지만 30여 년간 섬긴 사역들은 나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기에 그 제안들을 거절해왔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굴곡이 심화되고 선교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을 목도하다 보니 그간의 사역들을 기록으로 남겨놓을 필요성을 절감했다. 현재의 남북관계가 다시 풀려서 긴장이 완화되어 어느 누가 나의 사역을 이어서 하게 될 상황이 되면 저의 경험담들이 자료와 참고가 되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렵게 출간을 결심했다”고 말하는 김용덕 장로를 만나 그가 이뤄온 북한, 중국 그리고 동북아 지역에서의 사역들에 대해 물었다.

Q 회고록 출간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막막하고 예측불허인 남북관계와 국제정세 속에서 겪은 여러 사건과 체험담들 그리고 북측 인사들과 협상하는 과정들과 결실을 맺기까지의 드라마틱한 과정들이 단순하게 남북교류의 비사(秘史)로만 회자될 것이 아니라 복음통일과 북한선교를 통해 민족복음화를 이루고자 애쓰는 사역자들과 실무자들의 참고서와 지침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일반 신자들에게는 도전을 주고 싶었습니다. 또한 통일운동사와 교회사적 관점, 더 나아가 선교적 관점에서 볼 때 ‘사실(史實)’과 ‘해석(解釋)’으로 이루어지는 역사의 영역에서 사실 쪽에 더 비중을 두고 내용을 전개하기로 했습니다.

자칫 남북 분단의 차가운 얼음장 속에 영원히 묻힐 뻔한 생생한 사실들을 역사 위에 복원시키려 나름대로 애를 썼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개인적인 회고록이지만 전국에 있는 우리 교단 남선교회원들과 성도님들에게 드리는 대북사역 보고서로 읽힐 수도 있겠다고 생각되는군요. 그러나 회고록과 사역보고서의 의미를 넘어서 가급적 북한선교와 기독교적 통일운동의 실무적인 전략서가 되도록 방향을 잡았습니다. 막상 출간계획이 알려지자 이 대담집이 교회사적 가치는 물론 선교사적 측면이나 남북교류사 측면에서 볼 때 사료적 가치로도 매우 충분하다고 격려해주는 분들이 많았고, 동역자들이 적극적으로 협력해주셔서 무사히 출간될 수 있었습니다.

Q 평양에 ‘봉수교회’를 건축하게 된 계기와 과정을 소개 부탁드립니다.

봉수교회 건축은 2001년 7월 중순, 북경에서 북한 조그련 위원장 강영섭 목사로부터 급히 만나자는 제안이 와서 북경의 러시아 호텔에서 5시간의 장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그날 북측의 요청은 평양에 빵 공장을 건립해달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고 저는 우선 교회당을 먼저 짓는 쪽으로 주장했으나 그날 설득하지는 못했지요.

2008.7.16 봉수교회 헌당

그 후 4년 동안 북측과 계속 접촉하면서 협상하고 기도한 끝에 합의를 이루고 2005년 11월 11일, 역사적인 신축 감사예배(기공식)를 평양에서 드릴 수 있었습니다. 철근 콘크리트 골조를 재빠르게 세우고 남쪽으로 내려와 우리 교단신문에 기공식 예배 장면 사진과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 하면서 건축헌금이 모금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6년 11월 상량감사예배를 드렸고, 이어서 2007년 12월 입당감사예배, 이듬해인 2008년 7월 16일 마침내 헌당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들 속에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을 꼽자면 북측 당국으로부터 교회건축 승인을 받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희는 봉수교회당 건축뿐 아니라 칠골교회 재건과 평양그리스도교 사회복지관을 새로 건축한다는 내용들도 같이 합의했어요.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사회복지관 기공식(2005년 5월 6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날 밤 기도 중에 “하나님 앞에 교회(성전)를 먼저 건축해야지 봉사관을 먼저 짓는 건 안 된다”는 죄책감이 강하게 들면서 봉사관 건축 추진을 중단하기로 결심했죠. 저희는 교회당 건축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복지관 건립은 합동측 교단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8월, 봉수교회당 건축을 놓고 양측이 본격적으로 협의를 시작했으나 난관에 부딪혔죠.

무려 6시간 동안 열띤 토론과 논쟁을 이어갔으나 북측은 신축보다는 수리하는 쪽으로 밀어붙이더군요. 서로 큰소리가 오갈 정도로 끈질긴 설득과 협상 끝에 마침내 교회를 신축하기로 최종 승인을 받아냈습니다. 그 일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모든 절차와 과정마다 하나님이 모두 간섭하셔서 은혜롭게 마무리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토록 극적으로 건립된 봉수교회가 잘 유지발전할 수 있도록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가 힘을 모아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만간 북한에 10개의 교회당이 더 재건될 수 있도록 더 큰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이밖에도 대북 지원사업을 활발하게 펼치셨습니다. 이를 위해 어떤 과정이 있었나요?

1990년대 초중반 무렵 전무후무한 흉년과 기근을 당한 북한에 ‘고난의 행군’이 발생해 굶주리는 탈북자들이 중국 연변으로 넘어오는 것을 직접 목격했고 그들의 증언을 통해 정말로 수많은 북녘 동포들이 이미 죽었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직접 듣고 크나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어서 연길교회당을 건축하는 동안에도 탈북민 위주로 개별적으로 도와주면서 시작된 대북지원 사역이 2020년까지 지속됐습니다.

어느 날 택시를 타고 두만강가 언덕을 올라가 회령 땅을 바라보며 북녘 동포들을 위해 통곡 기도를 하고 귀가하던 중 아이 셋을 데리고 길을 걷던 할머니 행색의 탈북민 여인을 우연히 만나면서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전해주고 하염없이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개인적으로 지원 사역을 시작했고 점차 체계 있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밀가루 10톤을 트럭에 실어 함경북도 온성군으로 보냈습니다. 우리가 중국 현지에서 북한으로 식량을 보내는 것은 국제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생각보다 매우 복잡합니다. 그래서 용정시 농업 담당 국장을 통해 용정시와 함경북도의 상업국이 서로 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지원 물품과 식량을 전달하게 됐죠. 공식적인 첫 지원으로 미화 5천 불을 결제해 밀가루 10톤을 보냈고 두 번째 지원도 밀가루 20톤이었어요. 이런 식으로 1996년 3월에 시작된 지원 사역은 1998년에 본격화되어 서로 신뢰가 쌓이며 우리 남선교회와 노회, 교단차원으로 2001년까지 무려 수만 톤의 식량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북한 어린이들이 겨울에 내의가 없어서 추위에 떨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굿타이딩스 법인이 직접 나서서 어린이 내복 보내기 운동을 위해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 내복공장을 통해 한 번에 1만 벌씩 생산해서 매년 지속적으로 보냈어요. 그리고 2003년에 시작해서 2020년까지 15년 동안 매년 성탄절이 되면 북한의 장년 교우들과 어린이들에게 콩기름과 어린이 내의, 라면, 밀가루 등의 선물들과 물품들을 보냈습니다.

이밖에도 어린 생명들을 위해서 쌀국수와 라면, 내복도 보내주고, 때로는 회충약도 보내 주었는데 이런 지원이 끊기지 않고 지속되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30년 동안 우리 굿타이딩스 법인 회원들이 한 달에 5천 원씩 혹은 1만~2만 원씩 후원금을 보내 주어 이러한 지원 사역이 가능했습니다.

Q 북한 뿐 아니라 중국 ‘연길교회’ 및 두만강가에 여러 교회를 설립·건축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중국 연길교회와 우리 교단과의 공식인연은 1994년 9월 안동교회 김기수 목사님이 제79회 총회장에 당선되면서 연길교회 건축 지원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연길교회는 그 이전에 한국의 여러 교단들과 대형교회들이 건축을 시도했으나 도중에 손을 떼는 바람에 중단된 채 부채만 잔뜩 지고 있었던 상태였지요. 그러나 김기수 목사님이 주도하면서 총회 산하에 ‘연길교회 건축후원회’가 조직되고 김 목사님이 직접 건축후원회장을 맡고 제가 회계와 건축 총괄책임자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건축이 재개되어 여러 우여곡절 끝에 총건평 2천 8백 평, 5천 석 규모로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연길교회는 13억 인구를 향한 중국 복음화와 2천 5백만 인구를 향한 북한선교라는 두 가지 사역을 동시에 가능케 하는 특수한 교회이기 때문에 건축완공 그 자체만으로도 공산권 선교의 선두주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중국문화혁명 직후 300만 명이던 신자가 지금은 1억 3천만 명이 넘을 정도로 부흥했듯이 핍박을 받을수록 중국교회는 부흥해요. 그리고 한반도 통일문제는 더이상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니고 중국 조선족 동포들을 통해 중국복음화가 이뤄지고, 그 조선족 동포들이 한반도의 통일의 한 축을 담당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구상을 한 것이죠.

그래서 두만강가의 여러 시골마을에 개척교회들과 처소교회들을 설립했던 것입니다. 이런 작은 교회들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 내면의 변화를 유도하는 이른바 대안 선교를 시도했던 것입니다.

1996.11.1 연길교회 건축 완공 모습

용정 철북교회는 건축부지를 매입한 2007년 11월, 봉헌예배를 드림으로 지금까지 용정지역의 중국인(한족)들을 선교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도록 했고, 삼합진교회는 1800년대 우리 한민족 조상들이 배가 고파 중국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은 곳에 지었습니다.

두만강을 따라 조성된 마을들에 거주한 7천 명의 조선족 인구를 복음화해서 북한선교의 전초기지로 삼기 위해 복지관을 짓고 삼합진교회를 건립했죠. 그런데 강가에 위치하다 보니 교통편이 원활하지 않아 신자들이 교회를 왕래하기가 불편해 각 마을에 대소교회와 하마래교회 그리고 명동교회와 용신교회 등 네 개의 교회를 설립해서 삼합진교회의 지교회로 운영했습니다. 이 교회들은 탈북민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탈북민이 아니더라도 북한 주민들이 강을 건너 자주 들르면서 재정지원을 받거나, 상담을 받는 안식처 역할을 수행했고 식량이나 의류, 의약품들을 가져가도록 배려했지요.

Q 북한·중국 뿐 아니라 동북아 사역 또한 진행해오셨습니다. 동북아 사역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있는 사역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동북아선교회를 통해 선교, 복지, 탈북민, 의료, 교육 등 다방면에서 사역을 진행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동북아신학원 설립입니다. 동북아신학원을 설립해 현지 목회자들을 양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동북아신학원에 입학한 학생들은 원래 중국 심양에 있는 동북신학교를 3년 동안 공부한 출신들이 대부분입니다. 체계적이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목회 현장에 가서 사역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연장 교육 차원에서 신학원을 설립했죠. 커리큘럼을 짜고 목회학, 조직신학, 히브리어, 헬라어 등을 가르치는 유능한 강사를 한국에서 확보한 후 개교하여 매주 사흘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약 12시간 정도를 집중적으로 가르쳤습니다. 1주일에 36시간 강의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등록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체류비, 숙박비는 물론 교통비와 목회활동보조비 등 통학하는 비용과 체류비를 지원했어요. 13억 인구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할 훈련된 목회자를 배출하려는 비전을 갖고 시작한 일이라 아낌 없이 투자를 했던 것입니다.

2000.11.7 동북아신학원 1기 수료자들

학생과 교수진들 모두 중국 공안 당국의 눈치를 보며 비공개로 학업을 하는 등 힘든 시기를 거치며 마침내 졸업생들을 배출하게 됐어요. 1기생 3년, 2기생 3년, 3기생 3년, 종합 1년, 이렇게 도합 10년 동안 36명을 양육하고 32명에게 목사안수를 줬습니다. 그 32명이 지금 중국 전역으로 분산되어 목회를 하고 있는데, 작게는 50명에서 많게는 5천 명까지 목양을 하고 계십니다. 신자들 숫자를 모두 합하면 약 2만 5천~3만여 명의 교인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고 있는 셈이니까 이보다 더 소중하고 큰 열매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처럼 동북아선교회는 처소교회를 포함해 9~10개의 교회당을 설립했고 선교, 복지, 탈북민, 의료, 교육 사역을 해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신학원을 세워 목회자들을 양육한 일을 가장 보람있게 생각합니다. 지금도 저는 동북아신학원 출신 교역자들이 지속적으로 목회할 수 있도록 목회 자료를 우편물로 보내 주고 있습니다.

Q 이 모든 사역들을 담아낸 회고록이 곧 출간됩니다. 이를 읽어갈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남과 북의 막혔던 장벽을 2000년부터 2011년까지 10년 동안 터주시며 서로가 사이좋게 지내며 마음껏 통일을 이뤄보라고 기회를 주셨는데 세월이 흐르고 나서 돌이켜보니 우리 모두가 그 기회를 선용하지 못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내가 북측과 교류하며 추진했던 북한 복음화 사역 중에는 1차로 이북 땅 10개 지역에 교회를 세워서 1만 명의 신자들이 출석하도록 지원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되면 2차로 30개 교회로 확대하기로 했어요. 만일 그 사업들이 성취됐다면 지금은 신앙의 그루터기가 살아나서 북한 복음화의 전초기지가 되었을 겁니다. 당시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가 그런 절호의 기회를 수용하지 못해 하나님의 계획에 반응하지 못한 것에 대해 큰 아쉬움과 통한이 밀려옵니다. 물론 그 당시 저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했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한계가 있었고 결국 그 일을 이루지 못했기에 나의 시대는 이제 저물어 가고 나머지는 읽는 독자들이 이어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석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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