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목사 열전 (2) 평양교회 개척자 한석진 목사 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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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견지명 밝아 교회를 새롭고 넓은 곳 이끌어 

그의 온 생명 한국교회 개척·발전 위해 바침

전통을 깨는 데서 먼저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었으며, 예배당의 남녀석 휘장을 철폐했다. 그리고 여집사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총회에서 토론을 벌여 통과시켰다. 한국교회 초기에 두각을 나타낸 목사였다.

안동교회 유경재 목사는 “한석진의 진보적인 사고는 교회 안에서 금주 금연함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피우고 포도주를 공공연하게 마시는 일을 개의치 않았다. 그는 교회 규칙을 이것저것 정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것을 별로 중히 여기지 않았다.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고 생각할 때 제도나 의식이나 계율에 매이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흡연이나 술 마시는 일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고 했다. 

한 목사가 주초를 할 때 선교사나 교인들이 지적했다. 그때 숨어서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주초는 교리적인 것이 아니었으나 절제로 전개했던 교회운동이었다. 그러므로 지도자로서 모범을 보였어야 했다. 사도 바울은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 8:13)고 했다. 이것이 교회 지도자의 모범이었다.

한석진 목사는 평양교회, 장천교회, 일본 동경 유학생 교회의 개척자요 서울 안동교회, 마산교회, 신의주 제일교회를 중흥케 한 목사요, 교회 신문의 개척자요, ‘금강산 기독교 수양관’의 창설자로서 언제나 선견의 사명과 혁신으로 교회를 새롭고 넓은 곳으로 이끌었다. 그는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전국적으로 여러 사업에 관여했다. 

한석진 목사는 한국교회의 큰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가 여러 교회를 개척하고 건축하고 목회한 삶을 볼 때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10년 동안 가장 오랫동안 목회했으며 가장 목회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그래서 떠날 때 한 목사나 성도들이 매우 섭섭했다. 목회의 보람을 느꼈다. 그는 한국교회를 위한 지도자였다. 한경직 목사는 한 목사를 “선각자”라면서 신학교 동기생 일곱 중 “오직 한 목사는 벌써 머리를 깎고 안경을 쓰고 단장을 가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라고 했고, 백낙준 목사는 “한국교회의 개척자”라고 하면서 두 가지 특징을 들었다. 첫째, 한 목사는 내외국 동역인들과 같이 협력하여 장로교회의 정치제도를 우리 문화 환경에 맞게 제정했다. 둘째, 독립교회가 되는 데는 자진 전도, 자력 운영, 자주 치리, 세 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했다. “한 목사는 이 세 가지 조건을 추진하여 성취했다. 선교사들이 전도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기의 신앙의 확증대로 전도하여 교인을 구했고 예배당 건축과 교회 직원들의 봉급도 선교사에게 의뢰하지 않았고 교회의 모든 사업도 자력으로 운영했다.”

이렇듯 바르게 굽힘 없이 살아온 한석진 목사는 1939년 8월 20일 오후 10시 “사는 것도 주님의 뜻이요, 죽는 것도 주님의 뜻이다.” 남기고 고요히 가족들과 마침 문병차 왔던 김명선 박사, 고병간 박사 외 몇 교우들과 작별한 후 한국 기독교의 개척과 발전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한석진 목사는 괴롬 많고 수고가 많은 이 세상을 73세를 일기로 떠나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온 생명은 온전히 한국교회 개척과 한국교회 발전을 위해서 바쳤다. 참으로 그의 뛰어난 혁신적 사상과 사업은 그 어떤 것은 오늘에 이르러서야 겨우 실천에 옮겨지고 있다. 이리하여 그의 너무나 밝은 선견지명, 너무나 위대한 모습을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우러러본다. 그는 진실로 예수의 참 제자였다. 한국교회에 이런 선견자, 새로운 지도자상을 보여준 데 대해 감사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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