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나룻배」 시(詩)에서 본 인생 중량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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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라한 질곡의 세월
모진 구비 휘돌아와
바람부는 나루터까지 왔습니다

해질녘 어스름 선창
아득히 멀고 먼 본향
돌아갈 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혼자 왔다 또 황량히
홀로 외롭게 가는 길
타고 갈 배가 언제 올지 모릅니다

한뼘 남은 붉은 노을
저리도 피를 토하니
배는 분명 우레처럼 올 것입니다

표천 오성건 「나룻배」 전문

인생의 석양은 누구나 찾아온다. 그 시기에 이르면 한 번쯤 자신의 삶을 회고해보면서 인생의 중량을 느낀다. 어쩌면 피안의 세계까지 연상해 보는 것이 통념이다. 그러나 그 가치와 바라보는 세계관은 제각기 다르다. 시인의 작품 중 「나룻배」 시 1연부터 살펴보자.

“아스라한 질곡의 세월/ 모진 구비 휘돌아 와/ 바람 부는 나루터까지
왔습니다.”

시인이 살아온 역사적 상황은 ‘아스라한 질곡의 세월’에 비유했다.
1930~1940년대 겪어온 세대는 혹독한 일제강점기의 탄압에 못 이겨 몸부림쳐왔다. 그리고 1945년 연합군의 승리로 8·15광복을 맞이했으나
미국의 3년간 신탁통치로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고 1960년 4·19 이후 5·16, 12·12사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 온갖 혼란을 다 겪었다. 당시의 삶은 이 시가 표현했듯이 “아슬아슬한 질곡의 세월”이었다.
이러한 참상을 불과 9자의 시어(詩語)로 압축시켜 묘사 했다. 그리고는 “바람 부는 나루터까지 왔습니다”라고 했으니 그간 평온하지 못한 삶을 거쳐 노년을 맞이했다는 뜻이다.
본시 2연과 3연은 시인이 바라본 본연의 인생을 깊이 회상해 본 연이라고 하겠다. 2연을 좀 더 깊이 살펴보면 본향으로 돌아갈 배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의 배는 차안에서 피안으로 연결시켜주는 고리역할 이다. 3연은 언제 죽음에 이를지 모르나 준비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임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퍽 아쉬움이 밀려오는 시적 자아의 심정이다. 그러면 마지막 4연을 살펴보자.

“한 뼘 남은 붉은 노을/ 저리도 피를 토하니/ 배는 분명 우레처럼 올 것
입니다”

1연에서 3연까지 ‘아스라한 질곡의 세월, 본향으로 가는 황량하고 쓸쓸한 길’임을 표현 했다면 마지막 4연은 기독교인의 장엄한 자세로 감동의 명판을 보여 주고 있다. 참으로 수준 높은 시적 묘사가 아닐 수 없다.
이 세상 삶의 시간과 지는 해를 ‘한뼘’으로 묘사했고 ‘붉은 노을’은 다음
행에서 피로 묘사했다. 피는 생명이다. 장엄한 생명이다. 그 ‘생명의 피
를 토하니’라로 했으니 과연 여기서 피를 토함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영혼을 실을 배는 우레처럼 올 것이라고 했다. 우레는 천지를 진동케 하는 소리요, 시적 자아가 타고 갈 배의 고동소리를 우레로 비유했다. 그러니 세상 어느 대통령이나 수상이 행차하는 그 화려함이 거기에 비교가 될까? 시적 자아인 귀인이 타고 갈 우람한 배의 기적소리다. 천국으로 입성함을 암시해주고 있는 장엄한 그소리다. 이는 최후의 가치요, 시인의 열망일 뿐 아니라 시적 표현은 문학의 진수다.

 

하재준 장로

(중동교회·수필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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