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미학] 맞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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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가 없었더라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았으랴 싶을 정도로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이를 말로 다할 수가 없다. 아이스크림을 움켜잡고 할아버지는 안주겠다고 욕심을 부려도, 아껴 쓰는 만년필을 못 쓰게 만들어도, 심지어 하루 종일 놀아준 공도 없이 엄마만 나타나면 할아버지는 언제 봤느냐는 듯이 등을 돌리면 어찌 그리 서운한지. 그래도 그것은 순간일 뿐 밉지가 않고 귀엽기만 하니 이래서 노인과 맹탕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짝이 맞아 어울리는가 보다.

오늘도 애아범은 직장으로 출근하고 애어멈은 꽃꽂이 강습을 받는다며 집을 비워 손자 순길이와 단 둘이서 집에 남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인생 말년에 홀로 애나 본다고 청승맞게 여길지 몰라도 이것은 몰라서 하는 말이다. 한 사람의 생명이라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데. 한 나라의 재상도 될 수 있는 인재를 기르는 것이니 어찌 소중하지 않으랴.

 사실 따지고 보면 어느 누가 70이 넘은 이 나이의 노인을 맞상대해서 졸라대고 심술부리고 그리고 웃고 울고 하겠는가. 나이가 들어 지각이 들면 제짝 찾기에 바쁘기만 하거나 아니면 그래도 좀 관심이 있고 예의가 바르다는 것들이라야 눈치나 살피고 건성으로 마음에 없는 말이나 하면서 비위 맞추기에 급급할 뿐인 것이다.

하지만 손자 순길이는 말하는 게 전부이며 숨겨두고 눈치 보는 일이 없는 순진난만한 귀여운 맞상대인 것이다.

“하찌! 나가 나가 하찌.”

놀이터로 나가자는 것이다. 나가는 것은 여러모로 좋겠지만 창수에게 있어서는 여간 짐스러운 게 아니다. 우선 화단 둘레에 있는 야트막한 철제 울타리가 위험스럽고 땅바닥 모래가 눈에나 귀에 들어가면 어쩌나 해서 무척이나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혹시나 애들이 타고 있는 미끄럼틀이나 시소에라도 머리를 받치면 큰일이다.

이래서 순길에게는 놀이터이지만 창수에게는 극도로 긴장되는 고민터이다.

 이제는 어지간히 시간이 지났다. 그렇지만 집으로 돌아가자면 떼를 쓰고 발버둥질을 치며 야단이다. 이쯤 되면 귀엽고 사랑스러운 마음도 지치기 시작한다. 

이래서 늙은이들이 손자가 올 때는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말을 하는 것이리라.

“야 순길아 아이스크림 사줄게 집으로 가자.” 몇 번을 아이스케이크라고 말하는 시늉을 해보이자 그제서야 알아차렸는지 어청어청 걸어온다.

“하찌야 아이스크 아이스크 줘.”

“그래 그래 아이스크림 먹고 싶지? 가자.”

창수는 순길이를 벌렁 치켜들어 공중 높이 올렸다. 파란 하늘이 순길이를 둘러싼다. 가벼운 구름이 두둥실 떠 있다.

‘나의 귀염둥이 순길아. 나도 너와 같은 나이 때 할아버지가 이렇게 안아 하늘 높이 치켜 올렸을 거야.’

맞상대가 돼준다는 것. 꾸밈없이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 그리고 손톱만치도 나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

‘이래서 성경책에도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느니라고 쓰여있는 게 아닌가.’

원익환 장로

<남가좌교회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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