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생명의 길을 따라 온 걸음 정봉덕 장로 (15)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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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지역사회 공신력–사회문제 대처방안 마련 필요

  정봉덕 장로는 1927년 생으로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군대시절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한 뒤 60여 년간 주의 신실한 종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애썼다.

  총회전도부 간사를 시작으로 총회 사회부 총무, 공주원로원 원장, 한아봉사회 설립,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 등을 설립했다. 남은 생애 다가올 통일을 준비하며 북한 정착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하며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편집자 주 –

나는 그분이 자립기금을 위해 오신 줄 알고 기쁜 마음에 기독공보의 취지를 열심히 설명했으나 그분의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내가 보기엔 기독교 기관에서 일을 제대로 못하는 것 같다. 나는 헌금을 못 하겠다.” 그러더니 전화를 한 통 쓰겠다며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는 ‘3천만 원이 있으니 언제든지 갖다 써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전화 잘 썼다는 말도 없이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그때의 내 심정은 지금도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기독공보에 재직 중이던 1974년부터 3년간은 남선교회 전국연합회 총무를 겸직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평신도 회보를 창간하여 편집과 발행에 힘쓰며 노회별 순회 헌신예배를 진행하였다.

기독공보 재직 기간 동안 하나님은 내게 한 기관을 책임지고 운영하는 경험을 하게 하셨고, 사회 안에서의 한국 기독교를 보게 하셨다. 무엇보다 교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깊게 심어 준 시간이었다. 내가 제대하던 1955년에는 대부분의 교회가 천막교회였다. 십자가 탑에는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어 설교가 자연스레 지역사회로 흘러 들어갔다. 문제는, 설교는 흘러가는데 정작 교회의 활동은 그 내용을 따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도가 점차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기독공보 재직 당시는 경제개발 3차 5개년 계획 실시 기간으로 산업화에 따라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는 시기였다. 그래서 교회가 버스를 동원하여 교인을 호객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교회에서 종소리는 점차 사라지고, 강남에 교회가 들어서게 되면 집값이 떨어진다고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심했다. 한 마디로, 교회가 지역사회에 덕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러한 모습들을 보며 교회가 지역사회로부터 공신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더불어 현 대화에 의해 분출되는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대처방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와 교회가 실천하는 선교활동이 일치된다면, 이 두 가지를 모두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이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평신도인 나의 의식을 깨우쳐 주신 것이다.

지역사회를 향한 사회부

1977년, 총회 사회부에는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부장 김종해 장로는 사회정책협의회를 열고 교회의 대사회적 책임수행을 위한 토의를 가진 결과, 사무실을 상설하고 사회부에 총무를 세울 것을 결의한 것이다. 이때 큰 역할을 한 분이 김형태 목사이다. 그는 세미나 강사로 초빙되어 한국사회의 문제와 교회의 책임에 대해 강의했고, 교회가 대사회적 역할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총회의 깊은 공감을 얻었다. 사실 그러한 인식은 이미 많은 이들에게 있었지만, 김 목사처럼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총회에도 신학교에도 없었다. 결국 하나님은 한국 여러 개신교 교단 중에서 먼저 우리 총회에 사회부를 상설하게 하셨다.

정치적 혼란과 역사적 시련은 교회를 지키고 보존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게 만들어 ‘교회 성장’이라는 결과를 이루어냈다. 물론 이것은 매우 소중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거기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지역사회를 섬기는 선교적 역할에는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은 점차 한국교회 안에 들어왔고,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높아졌다. 3서 개헌,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 5.18 광주민주항쟁 등 산업화와 도시화, 군부 지도자들의 장기 집권으로 사회문제가 속출하는 시기에 성령께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당시 국내 많은 교단이 있었으나 사회부를 상설부서로 둔 교단은 대한예수교장로회뿐이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나 기독교대한감리회에는 다른 명의의 부서에서 대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었으나, 우리 교단의 정책과는 차이가 있었다.

당시 나는 기독공보를 자립시킨 능력을 높이 평가 받고 있던 때라 사회부 총무에 지원해 볼 것을 권유받았고, 그분들의 권유와 새로운 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지원을 하게 되었다. 지원자는 나와 A 목사 둘이었다.

서울 YMCA 회의실에서 사회부 실행위원회가 열렸다. 나는 기독교회관 808호에서, A 목사는 옆방에서 회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4시 반쯤 사회부장 김종해 장로로부터 전화가 왔다. 총무로 선임되었으니 와서 인사를 하라는 것이었다.

1978년 4월 1일, 한국 기독교회관에서 제62회 총회장 임택진 목사로부터 임명장을 받았다. 그때의 취임사를 아직도 기억한다. 나는 부족한 일꾼인 내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기를 그곳에 모인 내빈들에게 부탁했었다. 사람은 부족하지만 성령께서는 연약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며, 연합하게 하시고, 진실하게 붙드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총회 교육부 간사 김암 장로로부터 은급기금 통장(1천여 만원)과 장부 그리고 사회부의 구호활동에 관한 문건을 인계받았다(당시 사회부 부서는 은급위원회와 구제위원회뿐이었다). 그러자 내가 어떤 역할을 갖게 되었는지 보다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국내 많은 교단 중에 우리 교단에 사회부를 신설하신 뜻과 우리에게 부여된 선교과제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실행위원회의 결의로 제2차 기독교사회문제 협의회를 갖게 되었다. 1978년 6월 22~23일 이틀간 서울 수유리에 있는 크리스찬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총회사회부원 13명, 노회사회부장 23명, 여전도회 노회연합회 총무와 사회부장 7명, 평신도회 전국연합 사회부장 1명, 총회 학원 선교 실무자 1명, 선교동역자 1명, 장로회 대표 1명, 신학교 학우회장 1명, 총 48명이 참가하여 새로운 선교 사명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당시 총회 총무인 성갑식 목사는 개회예배 설교에서, 총회가 앞으로는 사회 선교에 주력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는 하나님의 선교는 국내외 선교와 더불어 사회 선교를 통합해야 하는 것임을 나타낸 것으로써, 우리 사회가 처한 척박한 상황 속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할 방법을 찾고자 한 것이었다. 196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교회는 지역 사회 주민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목회 계획을 수립하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지교회가 위치한 지역사회의 개발문제와 시찰 단위의 지역사회 개발문제, 그리고 노회 단위의 지역사회 개발 추진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주 강사인 연동교회 김형태 목사는 ‘교회성장과 사회개발’이란 강연에서, “교회 성장은 교회의 실존적 사명인 사회 개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회 개발과 경제 개발은 결국 인간 개발의 과정이며, 이는 전 세계 인구의 2/3인 제3세계 국가들의 해방과 자유와 연결된다”고 말했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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