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목사 열전 (3) 평양  대부흥 운동의 주역 길선주 목사 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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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한국 가락으로 만든 교회 노래 ‘뱃노래’

교회·사회 지도자로 조국 독립·자유 위해 선두에 서다

길선주 목사는 자신의 생각을 실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교회의 노래를 민족음악의 토양에서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한국교회에 서양 곡조보다 전통음악인 곡조를 담은 찬송가의 출현을 고대하게 했다.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의 한국 가락으로 만들어진 교회 노래는 1901년 5월 9일 ‘그리스도 신문’에 실린 ‘뱃노래’였다. 이 노래는 1913년 ‘쇼회챵가’의 멜로디로 재이용됐고, 1917년 김갑순의 가사에 의한 노래인 ‘만경창파에 적은’에도 사용됐다. 이 밖에도 1908년 발행된 최초의 연합 찬송가인 ‘찬숑가’에는 한국 음악이라 할 수 있는 한국적인 가락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길선주의 노력과 사상은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으로 국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약화되면서 계승되지 못했다. 

복음을 전하는 길선주 목사에게 이는 큰 고난이었다. 그는 민족의 회복과 독립을 위해 기도했다. 가족과 자녀의 안전을 위해 기도했고, 성도의 평화를 기도했다. 민족의 아픔은 백성의 고단함으로 이어졌고, 사람들은 기근과 질병으로 죽어갔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 민족에게 믿음을 주셨다. 하나님의 역사는 민족의 해방이나 압제자들의 처벌보다, 길선주 목사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신앙을 지키고 성장하는 것을 더 중요시했다. 길선주 목사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1919년 3.1 독립운동에 가담한 기독교 대표자였다. 이는 독립운동을 넘어 하나님의 진리에 역행하는 일본제국을 향한 정의의 선포였다.

길선주 목사는 이승훈 장로와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했으며, 평양 숭실대학교 기숙생 100여 명을 집에 모아 배포 구역을 정하고, 독립선언서를 서문 거리와 종로, 신창리에서 일제히 낭독하며 만세를 부르고 시위하는 것을 계획했다. 길선주 목사는 그해 2월 20일 가정예배를 드린 후 장연읍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고 서울로 향했으나 3월 1일 늦게 도착했다.

독립 선언식에 참여하지 못한 길선주 목사는 서울역에서 경찰서로 직행했다. 이때 평양 장대현교회에서도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무차별 구타를 당하고 구금됐다. 그러나 이들은 낮에는 성경을 읽고, 밤에는 기도하고 요한계시록을 암송하면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굳건히 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사람은 죄와 죽음에서 완전히 구원받고, 무지와 질병과 가난과 온갖 속박과 억압에서 해방되어야 자유를 얻는다. 진리만이 인생을 모든 속박에서 풀어 준다. 자유는 진리의 본질이 된다. 그러므로 진리의 본질인 자유를 거스르는 일은 그 어떤 것도 죄악이다. 자유를 추구하는 기독교는 언제나 죄악과 싸워야 하며 또 그것을 이겨야 했다.

죄악과 싸울 때 그것을 피하는 사람은 실패해 반드시 죄에 매인다. 그러므로 길선주 목사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부당한 간섭과 구속에서 벗어나야 하며, 기독교인이 이 일에 앞장설 것을 주장했다. 민족의 감정을 억압하는 상황에서 진리 수호를 위해, 자유를 위해 싸울 것을 역설했다. 길선주 목사가 쟁취하려는 자유는 진리에 속한 자유였다. 그러므로 그가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그는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갈구했으며 그 쟁취를 위해 선두에 섰다.

독립운동가 48명에 대한 일본의 재판 기록에는 길선주 목사가 했던 “나는 조선 독립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독립운동 했소”라는 말이 남아 있다. 이 말은 백만 신자의 정신을 대표한 것이요,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 뜻을 분명히 표현한 것이며,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건국 정신을 투철하게 표명한 것이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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