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산책] ‘누름돌’과 ‘오래 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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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할머니들이나 어머니들이 냇가에 나가 ‘누름돌’을 한 개씩 주워 오시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누름돌’이란 표면이 반들반들한 다소 묵직한 돌로 김장독 위에 소복이 담긴 김치 위에 올려놓으면 그 무게로 숨을 죽여 김치 맛이 들게 해주는 ‘누르는 돌(pressing stone)’을 말합니다. 생각해 보면 옛 어른들은 ‘누름돌’ 하나씩은 가슴에 품고 사셨던 것 같습니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을 텐데 스스로 자신을 누르고 희생과 사랑으로 그 아픈 시절을 견디어 내셨던 것이지요. 

요즘 우리에게도 그런 ‘누름돌’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쳐가는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 받고 주제넘게 욕심을 내다 깨어진 감정들을 지그시 눌러주는 그런 ‘누름돌’ 말입니다. 언제라도 그런 못된 성질을 꾹 눌러 놓을 수 있도록 ‘누름돌’ 하나 잘 닦아 가슴에 품고 싶습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누름돌’이 되어주면 좋겠고 부모 자식 간이나 친구지간에도 ‘누름돌’이 되어주면 세상이 훨씬 더 밝아지지 않을까요? 오늘은 그 옛날 정성껏 김장독을 어루만지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유난히도 그립습니다. 가슴에 ‘누름돌’ 하나를 품고자 하는 마음은 곧 자신의 감정을 자제(自制)하고자 하는 마음일 것이며 스스로의 마음을 자제한다는 말은 곧 ‘오래 참는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구한말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들은 ‘고통과 억압을 잘 견디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단 몇 초를 참지 못하고 ‘단추’를 눌러댑니다. 성격이 급하다 보니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빨리빨리”입니다. 우리는 ‘빨리빨리’ 문화로 세계에서 유례(類例)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경제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했으나 지금 엄청난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속도 조절을 하는 차원에서 ‘오래 참음’이 필요합니다.

한 번은 대전 시내에서 레커차(Wrecker: 고장난 차를 견인하는 차)에 소형차 한 대가 크게 상처를 입은 상태로 실려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소형차의 번호판이 얼른 시야에 들어왔는데 마지막 네 자리숫자가 “8282”였습니다. 내 나름으로 유추해 보건대 소형차의 소유주는 젊은 사람이었을 것이고 그는 그 차의 번호판을 교부받으면서 의도적으로 (어쩌면 웃돈을 주고) “8282”라는 번호판을 차지했을 것이며 그는 작지만 성능 좋은 그 자동차를 신나게 빠른 속도로 몰다가 저런 끔찍스런 사고를 당했겠구나 하고 미루어 짐작해 보았습니다.  

성경(고전13장)에는 ‘오래 참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래 참음’이란 “어떤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고통과 힘든 과정을 꾹 참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오래 참아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와의 관계에서 ‘오래 참으심’의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것이지요. ‘오래 참음’은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도 필요합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서로 만나는 시간과 알아가는 시간, 그리고 갈등의 해소와 우정이 깊어져 가는 데는 ‘오래 참음’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오래 참으면 얻는 유익이 많습니다. 이것을 역(逆)으로 말해서 오래 참지 않으면 잃어버리는 것이 많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 ‘오래 참음’을 지금 내가 하는 일이나 나의 삶에도 적용해야 합니다. 세상만사가 마음먹은 대로 풀렸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세상의 일입니다. 일이 힘들다고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래 참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오래 참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지키는 데에도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데는 실로 ‘오래 참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할수록 ‘의심의 마귀’가 접근합니다. “성경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일까?” “꼭 매주 교회출석을 해야 할까? 매일 성경을 읽어야 할까?” “삶이 어려운 때도 ‘십일조 헌금’을 해야 할까?” 사탄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믿음과 인내를 시험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보다 더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인내는 품성화(稟性化)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내는 힘들고 아프고 때로는 속이 상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기 때문입니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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