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강단] 격동하는 삶의 한 가운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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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극이나 드라마에 시청자들을 끌어들이는 방송국의 작전과 방법이 다양하다. 그 중에 확실한 방법이 극 중에 주인공이 위험에 빠져서 위기에 처한 모습이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할 때의 모습을 카메라로 바짝 당겨서 긴장감을 최고로 높인 다음 딱 끊어서 더 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다음 중요했던 장면들을 0.5~1초씩 끊어서 보여준다. 그러면 시청자들이 어떤 욕구가 일어날까? 다음 회를 더 보고 싶어지게 된다. 이렇게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게 되는 것’을 ‘여운’이라 한다. 여운은 아직 가시지 않고 남아 있는 운치, 또는 소리가 그치거나 거의 사라진 뒤에도 아직 남아 있는 음향이다. 

제자들이 그런 마음이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서 칭찬과 인기, 승리감에 다 가진 것 같은 풍족함이 이어지는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즉시 재촉하사 제자들을 바다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신다. 아직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도 급히 재촉하시니 얼떨결에 배를 탄 제자들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에 삶 속에서 종종 이런 일을 겪을 때가 있다. 어마어마한 풍랑이 배와 제자들을 집어삼킬 듯이 달려드는 것이다. 얼마나 당황스러운가? 이러면 우리 안에서 무슨 생각이 드는가?

‘아까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계속 있었을 것을’이라는 후회도 든다. 아니면 기적의 현장에서 속히 떠나라고 하신 주님이 야속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순종해서 왔는데!’ ‘주님을 따라왔는데!’

더군다나 그 시간이 몇 시인가? 밤 사경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새벽 3시다. 칠흑같이 어두울 때에 감당할 수 없는 격한 풍랑이 일었다. 이것이 시련이다. 고난이다. 아픔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답답함이다. 바로 그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바다 위를 걸어오고 있었다.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겠는가? 그런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왜 예수님께서는 물 위로 걸어오셨는가?’ 얼마나 급하셨으면 물 위로 걸어오셨겠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됐다.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의 다급함을 보셨기에, 두려움을 아시기에 그렇게 급하게 오신 것이다’라는 은혜가 부어졌다.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다급한 상황을 보신다. 두려움을 아신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의 삶을 뚫고 들어오신다. 다른 사람이 모른다 해도 주님을 아신다.

두 번째로 깨닫는 은혜는 어려울 때 즉시 응답하신다는 진리다. 27절, 31절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우리가 힘들 때, 우리가 지쳐있을 때, 우리가 낙심될 때 우리 주님께서는 손을 내미신다. 능력의 손, 은혜의 손, 치유의 손, 회복의 손을 즉시 내미신다. 

세 번째는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결하는지 가르쳐 주신다.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린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지만 잠시 후에 빠졌다. 왜 빠졌는가?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바람을 봤다. 

우리가 문제를 만날 수 있다.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답답한 상황 가운데 쌓일 수 있다. 그곳을 바라보면 빠진다. 무너진다. 쓰러진다. 넘어진다. 하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것을 뛰어넘어 걸을 수 있다. 일어날 수 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렇게 된다. 

마지막으로 격동하는 삶의 한 가운데서 인생의 승리는 어떻게 하는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예수님을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과 동행하라! 

명경근 목사

<김화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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