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긴과 보아스] 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심비우스로(From homo sapiens to homo symbiou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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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참으로 위험한 세상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이 세상의 변화를 주도해 왔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이 세상의 변질에도 한 몫을 감당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 교회가 변질이 아닌 변화를 주도하는 공동체로 다시 서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쓴다. 

1.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과연 복음은 무엇인가?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김근주 박사가 쓴 책이 있다. <복음의 공공성>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보통 복음이라고 하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한국 교회 안에 ‘나를 위해’ 라는 말은 정말 단골 멘트였다. 이 말 <나를 위해, 나의 죄를 청산하시기 위해, 나를 천국 보내시기 위해, 내게 영생 주시기 위해> 이 말은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틀리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100% 맞는 말은 아니다. 복음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 이웃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시다. 우리를 위한 복음이다.  

짐 월리스(Jim Wallis)는 그의 저서 <하나님 편에 서라>는 책을 통하여 “복음은 결코 사적이지 않다. 예수님은 개인의 속죄만 이루신 분이 아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그가 먼저 쓴 책이 있다. <부러진 십자가>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기독교를 공적 영역으로 끌어 올리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다. 

요한복음 1장 29절을 보면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도 보시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는가? 그런데 한국 교회가 복음의 공적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초대교회 시절, 이스라엘 땅의 신흥 종교이자 유대인들에게는 이단으로 취급받던 초기 기독교가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져가며, 수많은 사람들의 복음이 된 것은 당시에 천하고 우둔하고 연약하다는 노예, 여성, 어린이를 품었기 때문이다. 

 복음은 나만의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너와 나의 복음, 우리의 복음이다. 이것이 바로 공공의 복음이다. 우리 하나님은 나만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너도 살기를 원하신다. 아니 우리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2. 교회가 변해야 한다. 

서울신학대학 최형근 교수는 “한국 교회 안에 공적 복음이 살아나지 못하는 이유는 우상숭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최 교수는 우상숭배의 범위를 성공 지향적 사고, 권력 집착 행동, 육신의 정욕으로 요약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중심적 성향>이라고 꼬집고 있다. 최 교수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기독교 복음의 공적 차원을 사적인 영역으로 끌어내려 자기 만족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인간적 종교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계몽주의와 모더니즘(modernism)으로 인하여 인간의 자유성, 독립성의 추구가 자아를 극대화시켰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로 들어오면서 복음을 사유화했다. 무엇이든지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한다. 내 주장대로 되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우상 숭배이다.   

이정원 목사

<주하늘교회 위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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