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의 길] 나는 시(詩)를 쓰는 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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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신학자 이반 일리치가 말했다. ‘시, 도서관, 자전거가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그의 말은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이들과 동떨어져 보인다. 급변하는 현시대는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간다. 사색할 겨를도 없이 눈뜨면 다른 세상이다. AGI(인공일반지능)의 시대에 이반 일리치의 논리는 자칫 시간의 사치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의 말을 곰곰이 되새김질할수록 영성의 길이 보인다.    

시는 사색의 길로 이끈다. 필자는 사색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중학생 때부터 써오고 있는 일기 덕분이다. 일기장 곳곳에는 시어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예수님을 믿기 전, 시는 필자에게 친근한 벗이었고, 때론 깨달음을 주는 스승이었다. 시를 지을 때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곤 했다. 그러한 영향은 성경 시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지금의 단아한 목회 역시 시 사색함에서 얻은 결과라 생각한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주보 앞장에는 매주 시 한편이 실린다. 지난 23년간 한 주도 빼먹지 않고 해 온 일이다. 그 주간의 말씀 본문을 시로 재구성하여 묵상자료로 제공하고 있다. 한번은 전혀 알지 못하는 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주보 앞장에 실린 성경은 어느 번역을 참고한 것인지요?” 너무나 마음에 와 닿아서 질문하노라 했다. 성경 본문을 시어로 짧게 재구성한 것을 번역본으로 착각한 거였다. 같은 사물을 보아도 해석은 다르다. 시를 해석함도 그렇다. 필자는 매주 주보에 시를 싣고 그 해석은 교우들의 몫으로 남긴다.  

시가 주는 정서는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그러나 그러한 정서를 만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을 짓는다 함은 노력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시를 짓는 일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매일매일 시를 짓는 고뇌를 사서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잘 발효된 청국장을 나누듯 작자시를 지인들에게 나누고 있다. 필자의 시가 모두의 마음에 들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독자들로 하여금 시의 정서를 가짐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기를 바람에서다.    

시는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느끼게 한다. 역사서와 예언서가 죄악과 심판으로 점철되어 있다면 시가서는 완전 딴판이다. 시가에는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다. 어디 그뿐이랴. 시는 오로지 하나님의 구속하심과 위대하심을 찬양하며 살기를 권하고 있다. 필자는 할 수 있는 대로 성시에 마음을 쏟고 있다. ‘목자 되신 하나님’, ‘인도자 하나님’, ‘전능자 하나님’을 고백하는 시 말이다.     

필자는 성경의 시인들을 닮기를 갈망한다. 그들이 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였듯이 필자 또한 그러고 싶다. 하나님은 시를 통해 당신의 아름다움을 나타내시길 원하신다. 시가 있는 하루하루가 참 아름답다. 아마도 하나님의 마음은 시를 닮지 않았을까… 필자는 오늘도 시작(詩作)한다.  

박상용 목사

<살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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