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희 선교사] 다시 열린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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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버스로 8시간 정도 동쪽으로 가면 해발 7천미터 산골짜기에 돌카(Dolkha)라는 지역이 있다. 여기에 한국의 간질환자 치료기관이자 의료 선교기관인 장미회를 통하여 열두 개 병상의 자그마한 병원이 세워졌다. 한국 누가회와 여러 의료 선교 관계자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아담한 수술실까지 갖춘 병원이 되었다.

이 병원을 지을 때 현지인 동역자(Counter Partner)로 라즈 씨가 연결 되었다. 그는 지역 유지이면서 수도 카트만두에 집을 두고서 여유있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병원은 설립 후 한국에서 온 의료 선교사들에 의해 잘 운영되고 있었다. 아주 적은 액수였지만 진료비를 받았고 한국에서 의료품도 많이 조달되었다. 현지에서 구입하는 약품은 원가보다 50퍼센트 정도 싼 가격에 공급되고 있었으며 부족한 운영비는 장미회를 통해 어느 정도 보충되고 있었다.

그런데 몇 년 후, 라즈 씨의 마음이 변하고 말았다. 한국인 선교사들의 비자문제로 업무 처리를 하던 그가 어느 날 황당한 통보를 했다. “네팔 정부가 당신들에게 비자를 주지 않으니 모두 철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비자를 핑계 삼아 결국 한국 의료 선교사 전원을 돌카병원에서 밀어냈다.

1995년 6월에 장미회 이사장인 박종철 장로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당시 나는 방글라데시에서 4년, 스리랑카에서 4년간 선교를 마친 후 돌아온 뒤였다. 나를 찾아온 그가 말했다.

“내가 네팔에 급히 다녀왔는데, 지난 한 달 사이에 돌카병원을 라즈 씨에게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모든 조치를 잘해두었으니 강 선교사님이 가시면 그 병원에서 일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해 12월 초, 나는 두 번째 네팔 사역을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돌카병원의 현실은 박 이사장님의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병원 문은 닫혀 있었고 언제 열릴지 아무도 몰랐다. 나는 카트만두의 장미회 사무실을 겸한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면서 언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이곳저곳으로 이동진료를 다녔다.

그렇게 6개월쯤 지난 어느 날, 네팔 현지 장미회 사무실 행정 담당자가 돌카의 이장 등 관계자들을 여러 차례 만나면서 대책을 논의해 오던 중 드디어 결단의 모임을 갖게 되었다. 모이기로 한 시간이 임박하면서 관계 부처의 사람들이 속속히 회의 장소에 모여들었다. 분위기는 무거웠으며 표정은 다들 굳어 있었다.

이 모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회의였다. 세계 기독교 선교 역사상 그 유래를 찾기 힘든 복잡한 일을 해결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현지인이 외국인에 의해 세워진 병원을 빼앗은 것을, 외국인과 현지인이 다시 의논하여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놓자는 회의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현지인의 반발이 예상되었다.

회의는 네팔의 보사부 차관이 주관했고 여성복지부 차관, 주네팔 한국대사관의 서기관, 돌카 지역의 군수, 관계 부처 사람들과 라즈 씨 측에서 나온 네 명과 장미회 측에서 나온 네 명을 포함해 무려 40여 명이 모였다. 양국의 외교관과 정부 고위 관계자까지 참석할 정도로 중요한 회의였다.

네팔 보사부 차관의 개회 선언이 있자마자 라즈 씨가 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이 우리를 돕는다고 와서 무엇을 했습니까? 기독교를 전파했습니다.”

그는 다분히 자신 있다는 듯한 표정과 목소리로 첫 발언을 했다. 그러자 즉시 돌카의 이장이 삿대질을 하며 라즈 씨를 질타했다. 

“당신이 먼저 선교사들과 함께 기도하자고 했고 성경책도 나누어 주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그때부터 두 시간이 넘도록 라즈 씨 측과 현지 정부 관계자들과 장미회 측 사이에 고성이 오고갔다. 어느 쪽으로 결말이 날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면서 눈을 뜨고 계속 기도했다.

“하나님, 이런 형편에서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지혜를 주십시오.”

그러자 사회자인 보사부 차관이 나를 지명했다.

‘닥터 강, 이제 할 말은 다 나왔으니 당신의 의견을 들읍시다.” 그 순간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네팔에 처음 왔던 1982년, 포카라에서 사역할 때 경험했던 한 사건을 떠오르게 해주신 것이다. 그 회의 자리의 문제를 풀기에 가장 어울리는 답이었다. 나는 다른 논쟁이나 주장은 접어둔 채, 담담히 그들 앞에서 나의 과거 경험을 말했다.

“제가 처음 네팔에 온 때가 1982년이었고 1986년까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정부 병원인 간다키조날병원(Gandaki Zonal Hospital)에서 응급실 책임자로 일했었지요. 간혹 외부장이 안 계실 때는 외과 전체를 맡아 일하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시골에 사는 60대 할아버지가 배가 아프다면서 병원을 찾아왔습니다. 이미 발병 5일째라 수술을 해도 회생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술하지 않으면 사망할 것이 100%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보호자인 큰아들에게 동의를 받고 수술을 시도했는데, 환자가 결국 쇼크에 빠져 혈액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만 해도 네팔 사람들은 채혈을 하면 큰일이 나는 줄 알고 있었기에 안타깝게도 혈액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아들들조차 겁을 내 수혈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나의 피를 두 병 남짓 수혈해서 그 할아버지를 살렸습니다. 나는 지금 그때의 정신으로 네팔 사람들을 살리고 싶어서 이 땅에 두 번째로 온 것입니다. 어서 빨리 문제가 해결되어 돌카 병원의 문이 열리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내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매우 감동을 받은 표정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이야기를 했는데 성령님께서 강권적으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 같았다. 내 말이 끝나자 그 회의에서 더 이상의 논쟁은 없었다. 라즈 씨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만장일치로 한국 의사가 돌카병원을 인수하여 운영하도록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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