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선천 복음화와 민족 교육의 주역 양전백 목사 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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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했던 기독교 신앙으로 큰 위인 됐음 보여줘

평안북도 선천, 한국의 예루살렘 만든 장본인

아마도 상징적인 독립선언보다는 일제 당국에 청원하는 것이 더 실효성 있는 독립의 방안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러나 2월 23일 밤 남대문밖교회 함태영 조사 사택에서 열린 제2차 장로교·감리교 지도자 연석회의에서 독립운동의 일원화를 위해 독립선언서의 발표를 주장하는 천도교 측의 의견대로 방침을 바꾸었다. 

양전백은 거사일이 3월 1일로 정해졌으니 거기에 맞춰 반드시 상경하기 바란다는 이승훈의 연락을 받고, 그 전날인 2월 28일 밤 서울 남대문역에 도착해 근처 여관에서 하룻밤을 유했다. 그리고 3월 1일 오전 10시 함태영을 방문해 거사 장소를 확인했다. 이때 그는 함태영에게서 독립선언서 인쇄물을 건네받고 비로소 독립 선언으로 방침이 바뀐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독립운동의 대의를 위해 함께하기로 하고 독립 선언식이 열리는 종로 인사동 명월관 지점 태화관으로 향했다.

독립 선언식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33인 중 29인이 참석한 채 조촐하게 진행되었다. 불교 대표 한용운의 낭독과 만세삼창이 끝난 뒤 3시경 출동한 순사들에게 전원 체포되어 경무 총감부로 연행됐다. 취조 과정에서 양전백은 일제의 무단통치가 적합하지 않으며, 한국인은 일본인에 도저히 동화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후 그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 받고 1921년 11월 4일 마포 공덕리 경성 감옥에서 만기 출옥했다.

양전백 목사의 삶은 평범했던 한 사람이 기독교 신앙으로 얼마나 큰 위인이 됐는지를 보여 준다. 1922년 1월에 양전백은 선천북교회의 담임목회자로 돌아왔다. 이 무렵 목회에 힘쓰는 한편, 1917년 인가 취소를 당해 서당제로 유지하던 명신학교 재건에 착수해 1923년 반양식 교사를 신축하고 이듬해 9월 6년제 보통학교로 인가받았다. 그리고 유지들의 기부로 5만6천236원의 재정을 모아 1926년 재단법인 허가를 받았다. 이후 그의 나이 50대 말년에 목회 일선에서 은퇴했다. 

그는 말년 작업으로 1927년부터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편찬 책임을 맡아 서울 피어선성경학원에 머물며 교회사 자료를 수집해 이 책을 집필했다. 그 후 갑자기 병을 얻어 선천으로 돌아왔다. 약해진 몸으로 계속 선천북교회에서 목회하던 그는 1933년 1월 17일 64세의 나이로 집에서 소천했다. 

1895년부터 근 40년간 권서, 조사, 목사로 교회와 민족을 섬긴 양전백 목사는 12만여 리에 달하는 거리를  여행하며 복음을 전하고 3천여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무엇보다 그는 평안북도 선천을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만든 장본인이었는데, 그것은 비단 교회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도시 모범을 만드는 사업이기도 했다. 특히 명신학교와 선천중학교, 보성여학교의 설립으로 이어진 그의 교육사업은 선천을 민족 교육의 중심지로 탈바꿈시키는 견인 역할을 했다. 그의 장례는 1월 21일 5천여 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남궁혁 박사의 인도로 기독교 연합 사회장으로 엄숙하고 경건하게 치러졌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영신과 슬하에 2남(윤모, 윤직), 4녀(윤성, 유정, 윤숙, 윤도)가 있다. 1962년 3월 1일 삼일절에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 공로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선생(先生)은 웅변가(雄辯家)도 아니오, 문장가(文章家)도 아니며, 팔면(八面) 활달(豁達)한 사교적(社交的)인 사람도 아니요, 기책종횡(奇策縱橫)한 지략(智略)의 인사(人士)도 아니다. 다만 강직(剛直)한 의인(義人)이며, 자애(慈愛) 깊은 정열(情熱)의 사람이었다. 비리(非理)와 불의(不義) 앞에 추호도 굴(屈) 하지 않고, 빈천자(貧賤者)와 약자(弱者)를 보면 공정(同情)의 눈물을 흘리는 마음,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이는 그의 장례식에서 낭독한 조사의 한 구절이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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