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희 선교사] 사막에 두어도 살아날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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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아버지는 교회 장로셨다. 나는 그 영향으로 모태(母胎)에서부터 교회를 다녔다. 황해도 재령 출생이신 할아버지는 1930년대에 만주(滿洲)를 상대로 곡물(穀物) 무역을 하신 부호(富豪)셨다. 1년에 한 번 이상은 성진 시내의 극빈자들에게 무상으로 좁쌀을 배급하셨고, 백 원에서 이백 원이면 웬만한 집 한 채를 살 수 있던 시절에 천 원에서 이천 원에 달하는 거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하셨다.

여섯 아들과 두 딸을 낳은 할아버지는 자녀교육에도 열심이셨다. 셋째인 나의 아버지 강형일 씨를 제외한 다섯 아들은 서울에 있는 의과대학으로 유학을 보내 모두 의사가 되었다. 내과, 외과 등 전공 은 서로 달랐지만, 삼촌들이 모두 의사인 것이 내가 의사가 된 한 배경이었음은 분명하다. 할아버지는 재리에 밝고 인간관계가 좋은 나의 아버지에게 일찌감치 사업을 물려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가족은 육이오전쟁의 화마(火魔)를 맞닥뜨리게 되었다. 1950년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조금만 참으면 고향 성진에 다시 올 줄 알고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혼자 국군을 따라나섰다. 전쟁터에서 군인들의 심부름을 하며 돌아다닌 지 1년쯤 되었을까, 우연히 군의관으로 일하던 막내 삼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부모님과 동생들이 거제도 난민촌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뒤늦게 거제도에 합류한 나는 모자란 식량 배급 때문에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내 이름은 애초의 피난민 가족 장부에 없었기 때문이다. 견디다 못한 나는 혼자 부산에 가서 신문팔이에 길거리 과자 장사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 와중에도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있어서 새벽에 문을 여는 영어학원에 돈을 내고 다녔다. 그 시절의 공부가 훗날 의과대학 입학은 물론, 부족하나마 선교 사역을 위해 쓰이게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온 가족은 서대문구 아현동에서 빵 공장을 운영했다. 나는 새벽까지 집안일을 돕다가 아침 일찍 전차를 타고 동대문구 신설동에 있는 대광고등학교에 다녔다. 미션스쿨이 었던 대광고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다시 만났고, 설립자이신 한경직 목사님도 알게 되었다.

나는 몸이 약한 어머니를 대신해서 반죽해 모양을 낸 꽈배기를 기름 가마에 넣고 꺼내는 일을 했고, 밤늦도록 배달과 수금을 도맡아 했다. 일을 마치고 새벽 두세 시까지 공부하다 새우잠을 청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등교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러니 늘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고, 고등학생 시절에 우등생이 되어본 기억이 없다. 평균 85점 이상은 되어야 하는데 잘해야 82점이나 84점이었다. 그래도 방과 후에 밀가루 한 포대씩 반죽하며 꽈배기에 빵까지 만들면서 학교를 다닌 것치고는 괜찮은 성적이었다.

그런 나를 본 고등학교 친구들이 이런 말을 했다.

“원희는 사막에 갖다놔도 살 놈이다.”

나라 전체가 전쟁에 신음하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한 나는, 고3 때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위인전을 읽으면서 장군이 되어서 나라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해서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 건강했고 신체 조건도 좋았던 나는 충분히 합격할 줄 알았다. 그러나 신원보증인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해 떨어지고 말았다. 동네에서 자전거로 배달 장사를 하는 아저씨를 보증인으로 내세운 것이다. 낙심한 나는 신학교에 지원하려고 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나에게 간곡한 말로 부탁하셨다.

“너도 알다시피 너의 큰아버지 두 분과 작은아버지 세 분까지, 아버지의 남자 형제 모두 의사가 되셨다. 나만 의사가 되지 못한 것이 늘 아쉬웠다. 그러니 간절히 부탁한다. 네가 의사가 되어주었으면 좋겠구나.”

나는 의대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당시 힘들게 사시는 부모님께 효도하는 길은 순종임을 알았다. 아버지의 부탁을 따라 나는 의과대학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시험이 만만치 않았다. 영 어와 인문학 과목은 자신이 있었지만 수학은 영 자신이 없었다. 다행히 시험 전날 풀어본 수학 문제가 주로 출제되었고, 2차 구두 면접을 보러 가던 날에는 우연히 거실에 있던 ‘간추린 서양 역사’ 책을 꺼내 르네상스 편을 읽었는데, 그날 면접관이 내게 물어본 것이 르네상스에 대한 상식이었다.

드디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합격의 소식을 듣게 되던 날, 크게 기뻐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본 나는 모처럼 효도를 한 것 같아 기뻤다. 사실 내 실력으로는 합격하기 힘들었다.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쓰시고자 계획하셔서 준비하신 세심한 배려요,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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