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김병조 목사 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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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사’ 일반에게 널리 읽혀

임시정부와 다양한 방계조직의 활동

일본의 한국 침략사를 정한론으로부터 시작해 분석, 검토할 의도에서 편찬된 이 자료집은 전술했듯이 ‘국제연맹 청원서’와 함께 김규식 편에 국제연맹에 제출되었다.

사료 편찬 작업에서 자료 수집의 책임을 맡았던 김병조는 수집된 자료를 기초로 1921년 《한국 독립운동 사략(韓國 獨立運動 史略)》(上)(이하 《사략》)을 저술했다. 상해에서 한글과 중문으로 발간된 이 책의 표지명은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로 일반에게 보급되어 널리 애독되었다. 1894년부터 1920년까지 총 17장으로 구성된 《사략》에는 안창호와 구산 우인(龜山 友人) 장재한(張載翰), 그리고 저자 김병조의 서문이 실려 있다.

김병조는 자신이 역사가는 아니나 개국 이래 첫 대업인 독립의 염원과 이를 위해 누군가는 목숨과 맞바꾸는 인의(仁義)에 침묵할 수 없음을 저술 동기로 밝혀 강한 민족의식을 표현했다. 임정 역사편찬 작업이 사료 수집에 충실했기 때문에 《사략》도 1차 사료가 매우 풍부하게 제시되었다. 특히 3·1 만세운동 각 지역 상황과 당시 배포된 독립선언문 총 18종이 수록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무엇보다 1894년 동학혁명을 ‘갑오 전역(甲午 戰役)’이라 해 한국 독립운동사의 첫 기록을 외세에 저항한 ‘민중 항쟁(民衆 抗爭)’으로 서술했다는 점에서 근대 역사서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新年에 全國 同胞에게

백만 명의 날카로운 우리 용사 일시에 니러나 / 십삼도에 굳게 닷친 모든 철국 일시에 깨트려 / 이천만의 결박 밧은 원슈 철사 일시에 풀녀가고 / 동서구에 만감한 우리 동포 일시에 모혀들어 / 자유종을 니난 소리 흔천동지(焮天動地) 하는 그날 / 오직 전능하신 상제께 축도할 뿐. 아멘.

1921. 1. 1. 일재 김병조

상해 한인교회 목회와 국민대표회의 이후

거국운동 후 1919년 3월 3일 상해 거주 한인 100여 명이 ‘광복사업을 보익(補益)하는 단체’ 조직을 목적으로 상해 고려 교민친목회를 결성했다. 이 친목회가 9월 22일 상해 대한 민단으로, 1920년 1월 9일에는 상해 거류 민단으로 바뀌었는데, 임시정부가 3월 16일 ‘외지에 거류하는 대한인에게 자치제를 하기 위한 거류민 단체’를 공포함으로써 임시정부 산하조직으로 편제되었다.

한편 3·1 운동 이후 이주민이 증가하면서 상해 한인교회도 함께 성장했는데 이들은 주일학교와 부설 인성학교를 통해 교민 자녀의 교육을 담당했고, 교민 대상 애국계몽 강연도 개최해 정치, 종교, 사회 결사 기능을 담당했다. 이들이 장소를 옮기며 드린 예배처소는 곧 거류민단 사무소이자 임시정부 의정원의 회의 장소가 되었다. 김병조도 한인교회 목회와 교육사업, 거류민단 활동과 대한적십자회 등 임시정부를 둘러싼 다양한 방계조직에서 활동했다.

1919년 7월 개자이로 장안리 교민단 사무소에서 시작한 상해교회는 교인 수 증가로 담임목사를 선출하기로 하고 투표로 김병조가 선출되었다. 담임목사 체제 해외 한인교회는 집사, 권찰, 찬양대(단장 김태연) 등 교회 조직을 갖추었는데 한진교, 김태연이 집사직에, 조사에 심종열(沈鐘悅), 권찰에 최병선, 박헌양, 최명선, 이화숙, 최순신 등을 세웠다.

상해 한인교회는 교민사회의 종교적, 정신적 중심이면서 임시정부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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