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스탈린과 중국 모택동의 힘을 등에 업은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선을 넘어 남침했다. 북한군은 소련제 탱크 242대와 전투기 200대를 앞세워 무방비 상태로 방어나 공격이 열악한 국군을 무찌르고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당시 공병감 최창옥 대령이 상관의 명령대로 한강다리를 끊었다. 나중에 홀로 책임지고 사형 당했다. 피난 가던 시민이 많이 한강에 빠졌다. 평택전투에 맥아더(1880-1964) 장군이 일본 오키나와 미군을 보냈다. 전투엔 패했으나 미군개입이라는 보고가 김일성에게 들어갔다. 인민장교들이 모여 미군개입을 두고 전투 여부를 결정하는데 3일이 걸렸다. 인민군 3일 전투지연은 장면(1899-1966) 대사가 미국 33대 트루먼(1884-1972) 대통령과의 면담 유엔에 가서 협조를 구하는데 귀중한 시간으로 쓰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미군 지상군을 지원해 공산군 남침을 막겠다고 했다. 맥아더 장군으로 하여금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을 비롯해 6.25전쟁에 전투부대 파견국가는 16개국이 결정되고 의료 지원국 5개국, 물자 및 재정지원국 39개국이 결정되었다.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프랑스 필리핀 등 16개국의 전투 지원 속에 무기가 부실한 우리 국군은 최후 낙동강 전선을 구축했다. 미8군사령관 밴프리트(1882-1992) 장군은 유엔군을 지휘하고 경찰 병력으로 내무장관 조병옥(1894-1960)은 대구를 굳게 사수했다. 제1사단장 백선엽(1920-2020) 장군은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하며 앞장서 지휘해 낙동강 다부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한편 한국해병대 김성은(1924-2027) 대령은 1951년 8월 17일 통영작전으로 인민군 7사단을 무찔러 진해 마산 부산을 지켰다. 국군이 낙동강 전투를 지키는 가운데 한미해병대를 지휘한 맥아더 장군은 성공확률이 낮은 인천상륙작전을 1950년 9월 15일 승리로 이끌어 전세를 역전시켰다.
우리 해병대는 9월 28일 수도탈환의 승리를 이루고 이승만 대통령 지시대로 북진통일을 위해 38선을 1950년 10월 1일 넘었다.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제1사단이 10월 19일 평양을 제일 먼저 점령했다. 다른 북진 전선도 원산을 지나 혜산진까지 갔다. 피 묻은 칼을 압록강에 씻고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를 휘날리는 남북통일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호소를 들은 모택동은 1950년 10월 15일부터 6.25 전쟁에 중공군을 30만 명 정도 투입시켜 우리의 자유통일을 방해했다. 함경도 장진호전투에 미해병대 1사단이 포위되어 12월 혹한 속에 후퇴작전에 성공했다. 흥남부두에 도착해 기다리는 기적의 배 빅토리아 군함에 승선했다. 짐과 무기를 다 버리고 모두 1만 4천 명이 타는 기적 속에 레오나르 리루(1914-2001) 선장은 3일간 잘 운행해 거제항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1951년 1.4후퇴로 서울을 뺏겼으나 2월 11일 다시 찾았다. 전쟁은 38선을 두고 소강상태여서 휴전설이 나왔으나 진전이 없었다. 1953년 3월 5일 우리의 원수 같은 스탈린이 뇌일혈로 죽자 휴전협정이 급물살을 타고 진전되어 갔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통일 없는 휴전은 절대 반대한다” 외치며 휴전을 완강히 거부했다. 6월 28일 24시를 기해 이승만 대통령은 거제포로수용소 반공포로를 위시해 부산 대구 반공포로 2만 7천여 명을 석방했다. 그리하여 7월 12일 미국과 한미동맹이 되고 6.25전쟁 37개월만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성립되었다. 미국은 170만여 명을 파견해 3만여 명이 전사하고 장군의 아들이 142명 참전 41명이 사망했다. 우리 한국군도 64만 명이 희생되었다. 김씨 3대 체제 북한은 지금도 자유 없는 공산독재가 지옥을 이룬다. 우리는 6.25전쟁을 상기해 자유대한을 잘 지켜야 하겠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