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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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선교부의 개척과 매산학교의 신앙 교육 유산

자세한 보고를 듣고 있던 이 교회 평신도 와츠(G. D. Watts)는 자신이 한 가정의 선교사를 파송하겠다고 지원했다. 원래 와츠는 성실한 실업가였으며, 교회에서도 열심히 봉사하는 평신도였다. 이러한 형편을 잘 알던 프랫 목사는 와츠를 개인적으로 만나 순천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하자 순천선교부에서 일할 선교사 13명의 재정 1만3천 달러를 약속했다.

“와츠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순천선교부는 기필코 한국에서 모범적인 지역이 될 것입니다.”

광주선교부에서는 변요한 선교사가 하루속히 좋은 소식을 갖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는데 드디어 안식년을 마친 변요한 선교사가 부인과 함께 광주선교부로 돌아왔다.

“배유지 선교사님, 순천선교부에서 일할 인원을 확보해 놓고 왔습니다. 특별히 전위렴 선교사의 처남 교회에서 엄청난 복이 일어났습니다.”

자세한 보고를 받은 배유지 선교사는 곧 순천에서 일할 선교사를 인선해 미션회에 제출했다.

“변요한, 고라복, 안채륜, 리딩햄 선교사 부부, 미혼여성으로 비거(Miss M. L. Biggar, 1882~1959, 한국명 : 백미다), 듀프이(Miss L. Dupuy, 한국명 : 두애란 이하 두애란으로 표기), 그리어(Miss A. L. Greer, 1883~1973, 한국명 : 기안나), 팀몬스(Dr. H. L. Timmons) 의료 선교사 부부 등이다.”

미션회에서 이들의 명단과 함께 신분을 확인한 다음 도착한 대로 배치하기로 하고 우선 변요한, 고라복 선교사 부부가 1913년 4월 따뜻한 계절을 택해 순천으로 이사를 해 순천선교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런데 순천선교부에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했다.

고라복 선교사 가족이 순천에 이사온 지 얼마 안 되어 두 자녀가 이질로 고생하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순천선교부에서는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고라복 선교사는 두 어린아이가 한 알의 밀이 되었다면서 위로를 얻고 더 열심히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변요한 선교사도 이에 큰 충격을 받고 곧 광주로 이거한 후 팀몬스 의사만 머무르게 했다.

순천선교부에 모든 시설이 완공되자 다시 선교사들은 순천에 배치되었는데 변요한과 안채륜, 고라복 선교사 등은 복음 사역, 크레인(John C. Crane, 1888~1964, 한국명 : 구례인, 이하 구례인으로 표기), 두애란 선교사 등은 학원 선교, 비거 선교사는 부녀자 선교, 팀몬스 선교사는 의사로, 그리어 선교사는 간호사로 각각 확정되었다.

순천 매산남·여학교와 선교사들

순천선교부에 선교사들이 배치되면서 학교 사역을 책임질 선교사도 이때 임명되었다. 1913년 구례인 선교사와 두애란 선교사는 순천시 매곡동 동산 언저리에 자리를 잡고 건축을 시작했다. 1916년에 문을 연 매산남학교는 구례인 선교사가, 매산여학교는 두애란 선교사가 각각 맡아 학교를 운영했다. 이때 두 남·여학교는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얻기 위해서 허가서를 제출했으나, 교과 과목 중 성경 과목이 포함되어 있어 허가신청이 반려되었다.

학교 허가를 얻은 줄 알고 남학생 75명, 여학생 35명을 모집했지만 교육을 시키기도 전에 폐교되는 불행을 안게 되었다. 이때 책임을 맡았던 남학교 구례인 선교사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전임해 갔으며, 여학교의 두애란 선교사는 군산 멜본딘여학교로 전임해 갔다. 그러나 순천선교부에서는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교육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을 믿고 기도했는데 1919년 3.1운동 이후 총독부의 정책이 문화정책으로 바뀌자 순천 매산남·여학교가 문을 열게 되었다.

이 일을 위해서 오랫동안 준비했던 변요한 선교사는 남학교 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그후 원거(J.K. Unger, 1893~1986, 한국명 : 원가리, 이하 원가리로 표기), 구례인 선교사 등이 차례로 교장직을 맡으면서 교육권을 행사했다.

한편 여학교도 때를 같이해 개교가 이루어졌으며 백미다 선교사가 교장의 직책을 맡았고, 그후 밀러(L. B. Miller, 1888~1959, 한국명 : 민류스), 닷슨 선교사 등이 차례로 교장의 직책을 맡으면서 1937년 폐교 때까지 운영했다. 특별히 초대 교장을 역임했던 구례인 선교사는 1937년 매산학교 교장을 사임하고 곧 평양 장로회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불행하게도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되자 곧 귀국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다시 서울에서 문을 연 장로회신학대학 교수로 활동하다가 1956년에 귀국했는데 그의 저서 <조직신학 상·하>가 있다.

구례인 선교사는 미시시피 주에서 출생했으며 콜로라도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서들장로회대학과 리치먼드유니온신학교를 1913년에 졸업한 후 한국 선교사로 나오게 되었다. 그의 장남인 바울(Dr. Paul Shields, 1919~현재, 한국명 : 구바울, 이하 구바울로 표기) 선교사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서 전주 예수병원 원장으로 오랫동안 재직하면서 의술진을 대폭 강화하고 호남 제일의 의술을 자랑하기도 했다.

구바울 선교사는 1944년 존스합킨스병원 부속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그 병원에서 수련의 생활을 하다 군의관으로 1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1947년 아버지가 사역했던 순천에서 잠시 의사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전주로 이거해 1970년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서 원장으로 수고를 했다. 은퇴 후 얼마 동안 내슈빌에서 활동하다가 1996년 다시 전주 예수병원의 고문으로 파견 나와 어려운 상황의 병원 수습을 위해서 자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매산학교와 김형모 박사

매산학교와 선교사들의 청교도적 신앙을 전수받은 한국인 학생들은 그들의 삶을 실천한다면서 목회자의 길을 걸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김형모 목사이다. 김형모 목사는 매산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들의 협조로 평양 숭실대학을 졸업했으며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해 순천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변요한 선교사 송별식장에 나갔다가 순천역전에서 체포되어 그 길로 순천경찰서, 광주형무소에 수감되면서 철저한 일본 경찰의 감시와 고문을 받아 왔다.

그는 체포되기 전에는 엘리트 목사로서 벌교읍교회에서 시무하다가 재림사상과 말세사상을 설교 중에 교인들에게 의식적으로 불어넣었다 해 천황에 대한 불경죄로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김형모 목사는 변요한 선교사가 운영해 오던 순천성경학교를 1947년에 재건하고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순천선교부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미국남장로교 선교부 추천으로 1948년 미국 애틀랜타에 있는 콜롬비아신학교에서 유학을 해 그 곳에서 신학석사(Th. M.) 학위를 받고 다시 텍사스 주에 있는 오스틴대학에서 신학박사(Th. D.)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귀국 즉시 매산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순천을 비롯해서 5개군 지역 청소년 교육을 맡고 말씀과 기도로 학생들을 지도했으며, 교육의 저변 확대를 이루어야 한다면서 야간부도 설치해 많은 청소년들에게 중등교육을 실시해 사회로 배출시켰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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