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회, 나의 일생] 장로, 교회의 본이요 세상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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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과 신약, 그리고 교회사 속에서 ‘장로’란 신앙 공동체의 리더를 뜻한다. 2025년, 금년은 한국 선교 14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암울하기만 했던 이 땅에 기독교 복음이 전해지면서 교회와 학교, 병원이 세워졌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선교사들을 돕는 평신도 지도자로서의 장로 제도가 생겨났다. 특히 장로교회 안에서 장로직은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한국 기독교 선교 초기에는 나라를 빼앗기는 아픔과 숱한 고난, 치욕을 겪어야 했다. 그 시절 신앙은 애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으로 이해되었다. 특별계시로서의 구원의 복음과 일반계시로서의 나라 사랑은 모두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여졌다.

한국 교회 최초의 장로라고 하면 누구나 서상륜(徐相崙)을 떠올린다. 그는 14세에 부모를 잃고 할머니 손에 자라 결혼했지만, 만주와 의주를 오가며 인삼 장사를 하느라 가정을 지키지 못해 아내를 소박하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권서인, 교회 설립자로서 왕성히 신앙 활동을 펼쳤으나, 장로나 목사로 임직 받기를 끝까지 사양하고 평신도로 살았다. 결국 한국 최초의 장로는 서상륜 대신 소래교회에서 장립한 그의 동생 서경조(徐景祚)가 되었고, 그는 1907년 한국 최초로 임직한 7명의 목사 중 한 사람으로 초기 한국 교회를 섬겼다.

그 이후에도 여러 장로들이 있었지만, 초기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단연 길선주(吉善宙) 장로가 떠오른다. 그는 1896년 예수를 믿고 이듬해 세례를 받았으며, 1901년 장대현교회 장로로 임직되었다. 장대현교회 조사로 섬기며 1905년부터 새벽기도운동을 이끌었고, 평양신학교 신학생이던 그는 새벽 설교를 도맡았다.

물론 1898년 황해도 강진교회에서도 새벽기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새벽기도를 정례화·제도화한 것은 아무래도 평양 장대현교회의 길선주 장로의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교회사가가 아닌 필자의 사견일 수 있지만, 의미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새벽기도운동뿐 아니라, 남자석과 여자석을 가르던 교회당의 휘장을 걷어치운 사회 개혁가였으며, 목사로 임직된 뒤에는 1919년 3·1운동에서 33인 민족대표 중 한 사람으로서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당시 장로나 목사가 된다는 것은 단지 교회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나라의 지도자로 부름받았다는 의미였다.

일제강점기에 교회를 세우고 애국운동,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장로로는 남궁억(南宮檍) 선생과 이승훈(李昇薰) 선생을 기억해야 한다. 독립협회와 황성신문 창립자였던 남궁억 선생은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목격한 뒤 관직을 내려놓고 홍천군 서면 모곡리로 들어가 무궁화 묘목 나누기 운동을 펼쳤다. 그가 지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찬송시는 또 하나의 애국가라 할 만하다. 그는 “내가 죽거든 둥근 무덤을 만들지 말고 내 시신을 나무 밑에 묻어 조국의 독립을 보게 하라”고 유언했다. 오늘의 4월 5일 식목일은 그의 별세일로, 우리 민족이 나무 한 그루를 심을 때에도 애국의 마음을 담았던 것이다.

“나라를 빼앗긴 자들이 자기 혼자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게 기독교더냐!” 하고 호통치며 33인 민족대표로서 독립만세운동을 이끈 이승훈 장로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는 전주 오산학교의 설립자이자 교장이었고, 오산교회 설립 장로이기도 했다.

이처럼 초기 한국교회의 장로들은 교회의 본이자 세상의 빛이었다. 그들은 주님 사랑과 나라 사랑을 따로 떼어 생각하지 않았다. 순교는 곧 순국이었고, 순국은 곧 순교였다. 일제강점기의 위기 속에서도 빛났던 장로님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 교회가 있고, 대한민국이 이렇게 우뚝 설 수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제 106회 총회장•제 5회 한교총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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