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회복] 그리스도인의 죽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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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죽으면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로  간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러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주님께로 가는 것이니 공포, 두려움 대신에 기쁨이 되어야 마땅한 일이다. 육으로 있을 때 섬기던 주님을 그  면전에서 뵙게 되는 것이다. 죽음에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느낌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죽음의 원인은 여러가지다. 체질의 약함, 부모의 부주의, 의사의 잘못, 본인의 잘못, 뜻하지 않은 사고, 전염병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최대의 사인(死因)은 하나님의 요구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요구하시면 죽는 것이다. 한 마리의 참새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 하나님의 분부에 의하지 않고는 한 사람의 인간이 죽을 리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죽음을 가장 좋은 것으로 간주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요구하신다. 여기에 진정한 체념(諦念)이 있다. 이렇게 깨달을 수 있으면 죽음은 슬프지 않게 된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죽음을 볼 때마다 우리는 새삼 거대한 공포를 느끼게 된다.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 세상에 또 있겠는가? 비록 수명을 다한 늙은이의 죽음이라 하더라도 죽음은 죽음이다. 무엇으로 죽음을 위로하겠는가! 철학, 문학, 예술을 통해서도 위로할 수 없다. 하루는 영원의 한 순간이다. 한 사람은 인류의 한 방울이다. 하루, 한 사람은 천하보다 귀하다는 생각을 한다.

무엇으로 죽음을 위로할 것인가!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는 신앙만이 능히 죽음을 위로할 수 있다. 사람은 도저히 죽음을 이길 수가 없다. 세월이 지나면 잊을 수는 있겠지만 단념할 수는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哀痛)하는 것이나 곡(哭)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 이것이 복음의 극치다. 복음이 만일 죽음을 위로하는데 족하지 못하다면 그는 아직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죽음을 위로할 만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 말고 달리 없다.

우리의 사별(死別)은 절망의 슬픔이 아니다. 재회의 소망을 지닌 슬픔이다. 아름다운 눈물이 따르는 슬픔이다. 앙천곡지(仰天哭地)의 절규가 아니다. 눈물에 흐느끼면서 노래하는 찬미의 소리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유익은 특히 죽음을 보았을 때 알게 된다.

세상에 가련한 것치고 불신자의 장례식과 같은 것도 없을 것이다. 그 자리에 있을 때 유족을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한다. 불신자의 사별은 비통의 극치다. 한 점의 빛도 비치지 않는 암흑이다. 우리는 그저 머리를 숙이고 조의(弔意)를 표할 뿐이다.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사람을 떠나 보내는 슬픔이다. 이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다는 슬픔이다. 내 곁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새 영혼이 들어왔다고 기뻐할 것이다. 환영하는 찬송이 울려 퍼질 것이다. 마치 세상에서 새 생명이 태어났을 때의 기쁨과 환희일 것이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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