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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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맞선 식민 교육, 미션학교 폐교와 선교사 추방

미션학교 폐교·선교사들의 강제 출국

호남 지방에 있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선교부가 상설로 개설된 지역마다 미션학교를 설립하고 기독교 지도자들을 양성할 뿐만 아니라 민족과 교회에 헌신할 수 있는 많은 지도자들을 양성했다. 더욱이 여성 교육은 괄목할 만했다. 남존여비의 철저한 바탕에서 여성을 교육시키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선교사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그 벽을 넘어 많은 여성 지도자들을 안방에서 끌어내어 교육에 성공했다.

더욱이 일제의 가혹한 무단 헌병 경찰 통치시대는 물러가고 문화정책이 서서히 대두될 때에 호남 지방에는 미션학교뿐만 아니라 일반 교회에서 운영하는 초등학교가 121개나 있었으며, 학생도 자그마치 4천693명이나 되었다. 이 숫자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보다 2배나 많은 숫자였으며, 1923년에는 244개 학교에 8천921명이나 되어 2년 전보다 두 배나 증가된 셈이다.

한편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미션중학교의 학생 실태를 살펴보면 학교마다 크게 증가했음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남학교에 학생들이 몰렸던 것은 기독교의 가정이 호남지방에 널리 확산되면서 기독교의 가정은 일본 천황의 식민지 교육보다는 하나님 제일주의 교육이 필요하다면서 미션학교로 학생들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몰려오는 학생들을 수용할 만한 시설도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교사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선교에서는 몰려오는 학생들을 실력 있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면서 1921년 5월부터 매년 교사 강습회를 실시해 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 온갖 힘을 기울였다.

그런데 성경과목 문제로 인가가 취소되었던 순천 매산학교에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당시 동아일보(1922. 3. 3)에 뜻하지 않은 기사가 대서 특필로 쏟아지고 말았다. 그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고등과 1학년 30여 명 일동은 그 담임 선생 이은갑 씨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사면한 것을 기회로 삼아서 교원들의 교수가 불충분해 배울 것이 없으니 교원 일동을 개선해 달라는 조건으로 동맹 휴학을 단행했다. 학교 측에서는 오는 새 학기부터 개선하기로 예정한 터인데 학생의 신분으로 경거 망동했다 해 그 주의선동 혐의자 두 명을 출학 처분하고 그 외는 일주일 내에 회개해 자복한 자는 통학을 허락한다 했으나 학생들은 다른 학교에 입학하든지 차라리 강의록을 공부하겠다고 통학지 아니하고 통학하는 학생은 불과 7~8명이라더라.”

이 기사를 접한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하루속히 학교를 정상화하고 일류 학교로 만들기 위해 선교본부에 12만 달러를 청원했지만 미국 교회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3천 달러만 지원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 교육 선교사 12명을 파송했지만 여전히 교사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호남 지방에 있는 각 지역 노회들이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재력은 더욱 없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는 신사참배와 천황제 교육에 비협조적인 미션학교에 또 다른 차별이 공공연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미션학교들이 3·1운동시 각 지역의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기에 가능한 한 미션학교에 대해서 차별을 기했으며,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중등학교 졸업자들은 학무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자 자연히 공공기관이나 상급학교 진학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이 무렵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는 각 도시마다 중등 교육기관인 농업학교, 상업학교,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면서 미션중등학교에 진학하려 하는 학생들을 유인해서 천황제 교육을 이수할 수 있도록 학생유치운동을 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파악한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공립 고등보통학교와 고등여학교의 시설 못지않게 좋은 시설을 갖추고 학생을 교육시키겠다는 의지로 시설을 확장하고 교사도 확보했다. 그리고 1923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지정 학교라는 이름을 얻어 호남지역에 있는 남녀 10개 학교를 대표해서 전주에 있는 신흥학교를 전주신흥고등보통학교로, 광주에 있는 수피아여학교를 광주 수피아고등여학교로 각각 승격시켰다. 

한편 경제적인 여건으로 광주나 전주에 갈 수 없었던 학생들을 위해서 각 지역 미션학교는 중등과 3년까지 교육을 시키고 나머지 1년은 광주와 전주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런가 하면 전남에도 중등교육의 장이 필요하다 해서 광주 숭일학교에서는 1926년에 공업과를 설치해 실업교육에 치중했다.

이처럼 일부 학교가 개편되자 미국 선교 본부에서는 미국 교회 독지가들의 힘을 얻어 수피아고등학교는 1927년, 신흥고등보통학교는 1928년에 각각 새 건물을 지어 시설 확장에 큰 도움을 줌으로써 두 남녀 학교는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이후 이 학교를 졸업한 남녀 학생들에게 공공기관이나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길이 열려지자 많은 학생들이 몰려왔다.

한편 미션학교들이 각 지역에서 활발하게 발전해 가고 있을 때,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이 전쟁으로 인해 많은 일본 군인들이 희생을 당했다. 이때 평양에서는 서기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평양신사에 평양 시내에 있는 모든 중등학교 학생을 동원해서 천황을 위해 전사했던 황군의 위령제에 참가하도록 했지만 미션학교에서는 이를 거절했는데 이것이 미션학교와 조선총독부와의 첫 대결이 되었다.

그후 1935년 미션학교인 평양숭실전문학교의 교장 매큔(G.S.McCune, 1872~1941, 한국명:윤산온)은 일본의 천황제 교육에 불응했다 해 강제 출국 명령을 받았다. 이러한 바람이 서서히 남하하면서 호남 지방에 있는 미션학교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더욱이 호남지방에 있는 미션학교들은 오직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학교였기에 일본 천황제 교육과는 정면 충돌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1935년 11월에 전주선교부에서 모이는 미국 남장로교선교부 정기 연회에서는 시종 무거운 침묵이 회의장을 덮고 있었다. 이때 선교사들은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일본 천황제 교육제도와 정면 대결을 하겠다는 의지로 학교를 폐교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때마침 미국 남장로교 총회 본부 해외선교부 총무로 활동하고 있던 풀턴(Dr. C. Darby Fulton) 목사가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전주와 군산, 목포와 광주, 순천 선교부와 미션학교의 형편을 소상하게 조사했다. 풀턴 총무는 일본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일본 천황제나 신사제도에 대해서 다른 사람보다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풀턴은 미국 남장로교 일본 주재 초대 선교사로서 동경에 있는 메이지학원대학 신학부 교수로 있으면서 오랫동안 일본 교회 목회자를 양성해 왔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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