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이 모두 어떤 행위를 이름이 아니라 행위로 표출되기 위한 힘을 제공하는 근원적인 요소를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악과 악행, 선과 선행은 엄밀히 말해 다른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선이고 하나님을 떠나면 악이다.
인류가 하나님을 떠나면서 자신의 내면이 전쟁터가 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도 서로 원수가 되었다. 고통은 발전의 원동력이 되지만, 선이 더 큰 원동력이 되는 것을 보면 악의 필요성은 설득력이 없다. 실낙원 때부터 세상에 죄악이 존재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인류의 슬픈 운명인가? 실망과 좌절감과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기쁜 소식’이 들려온다. 이 기쁜 소식은 너무나도 간단 명료하다.
십자가의 고난을 담당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러면 믿음이라는 것, 즉 ‘신앙’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사실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며, 우리는 마땅히 믿어야 할 것을 믿지 못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바울, 루터 등이 모두 한마디 말씀에 믿음이 생겨 낙원을 회복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고난을 담당하신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속죄’할 수 있는 ‘원리’는 무엇일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죄는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속죄’에는 반드시 대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완전무결하신 예수님이 대신 죄를 지셨다. 자칫 속죄를 무책임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속죄의 목적은 본래 우리를 완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데 있다. 속죄의 원리가 이토록 간단명료한데도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이 허식과 복잡한 것을 좋아해서 궁해지기 전까지는 진리 앞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치무라 간조의 글은 전체적으로 경험을 한 후에 그 원리를 고찰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우치무라 간조는 솔로몬처럼 탐구심이 강하고 자신의 욕구에 대단히 솔직한 유형의 사람이다.
죄와 믿음의 본질을 예리하게 통찰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친근하게 읽히는 우치무라 간조의 글을 읽게 되어 매우 반갑다.
그동안 모두 6회에 걸쳐 우치무라 간조의 저술에서 명상할 수 있는 글귀를 모아 소개한 것이다.
박이도 장로
<현대교회•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