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54)

Google+ LinkedIn Katalk +

호남 지역 미션학교 폐교,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 철수

같은 신학부 일본인 교수인 우에무라(植村正久)와 신학 방법론 문제로 서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그때 풀턴 교수는 관서 지방인 고베로 옮겨 고베에 고베 중앙신학교를 설립하고 그 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풀턴 총무는 일본에서 자라면서 일본을 배웠으며, 그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 일본 관서 지방과 관동 지방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본국 본부의 요청으로 해외선교부 총무가 되어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식민치하에 있는 미션학교의 의미는 일본 천황제 교육을 돕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면서 호남지방에 있는 모든 미션학교의 폐교를 단행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떠났다.

이러한 결과를 접한 호남지방의 10개 미션학교는 갑자기 초상집이 되고 말았다. 어렵게 학교생활은 했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다니는 학교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갑자기 폐교를 단행한다는 소식에 모두들 놀랐다. 이렇게 몇 개월 지나자 1937년 7월 7일 중일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이 일어나자 공립학교 학생들은 매월 1회씩 일본 천황군의 전승을 빈다면서 각 지역 일본 신사를 찾아 참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때 미션학교에도 도내 학무과로부터 이러한 지시가 전달되었다.

그러나 미션학교 교장 선교사들은 이 일에 비판적이었기에 한 사람의 학생도 보내지 않았으며, 오히려 신사참배가 있는 날은 일찍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보내는 일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자 광주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목포 정명여학교, 영흥학교는 도당국으로부터 폐교 처분을 받았으며 순천 매산 남녀학교, 전주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는 자진 폐교계를 도당국에 제출하고 자진 폐교했다. 한편 군산에 있는 영명학교나 멜본딘여학교도 역시 폐교되고 말았다. 

이로써 호남 지방에 있는 남녀 미션학교 재학생 4천787명은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이 중 일부는 같은 지역에 있는 공립학교로 전학을 갔으며, 그 중 전주 신흥고등보통학교 재학생들은 일본인 마스도미 장로가 세운 고창고등보통학교로 전학을 했다.

그후 1년이 지난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모인 제27회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으며,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이들은 총회를 대표해서 당시 부회장인 김길창 목사의 인솔하에 총회 임원 및 각 지역 노회장이 평양 신사에 가서 신사참배를 했다. 이날 선교사들은 신사참배 결의는 불법이라고 항의를 했지만 경찰들의 저지로 그 뜻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신사참배의 결의는 이미 지방노회에서 결의를 하고 총회에 상정을 했는데, 1938년 2월 9일 제53차 평북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모이는 노회마다 다같이 결의를 했다. 미국 남장로교의 선교 관할 지역이었던 호남 지역에서도 1938년 4월에 모이는 제주노회를 선두로 해서 순천노회, 전북노회, 전남노회 등이 차례로 결의를 했다.

한편 총회에서까지 신사참배에 대해 결의를 한 것을 본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에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놀란 미국 남장로교 조선선교회 회장인 마로덕 선교사는 1938년 9월 29일 전주에서 전체 선교사들을 소집하고 선교사들의 의견을 청취한 다음 결정된 사항을 각 지역에 있는 노회장 앞으로 공문을 작성해 발송했다. 그 결의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현재 형편에 의하면 본 선교사들은 종래의 선교 정책을 변경해 교회 관리에 대한 책임과 해 노회원으로서 책임을 계속 그 임무를 담당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2. 비록 이와 같이 결정했을지라도 교회의 평화와 사랑을 위한 관계는 단절치 않고 계속하기를 원하며, 우리 하나님이 우리 양심에 지시하는 대로 교회에 협조할 소망은 다음과 같이 표시합니다. 교회와 노회간을 연락하여 교회 부흥 사경회와 성경 가르치는 일과 개인 전도와 심방은 원합니다.

3. 선교회 보조는 금후 6개월간만 계속하고 그 이후는 끝내기로 합니다. 선교역사상 일대 시련기에 처하여 무엇보다도 현명한 지조와 조언을 요구하고 있던 노회로부터의 탈퇴는 가슴을 에는 듯한 아픔이었습니다. 이후 선교사들은 노회와 관계가 단절된 채 불신자를 상대로 한 개인 전도사업에만 열중하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린 미국 남장로교 조선선교회에서는 약속이나 한듯이 6개월이 지난 1939년 3월부터는 일절 선교비 보조를 끊고 말았다. 그리고 선교사의 사역장이 좁아지면서 1차적으로 미션교와 성경학교에 있던 교육 선교사들이 철수해 미국으로 모두 돌아갔다. 

한편 일반 농어촌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선교사들도 돌아갔고 마지막으로 병원 선교를 맡은 일부 선교사들만 남았다. 그리고 재산을 관리하고 있던 타마자 선교사와 순천 애양원을 관리하고 있던 유화례 선교사, 닷슨 선교사만 남게 되었으나 이들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1942년 3월에 귀국했다. 이 일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한 사람도 남긴 없이 선교지를 떠나게 되었으며 이들은 한결같이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는 날이 올 것을 믿고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선교부에서 모두 떠나고 말았다. 이 일로 한국 교회는 큰 타격을 받았으나,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올 것을 믿고 서로 위해서 기도하자면서 선교사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학교 시설은 여러 형태로 바뀌었다. 우선 전주 신흥고등보통학교의 본관 건물은 금융단에서 접수해 사용했으며, 학교 시설은 새로 출발하는 순창농업학교와 광주의학 전문학교에서 인수했다. 목포 영흥학교는 1941년 신안군 암태의 지주인 문재철이란 사람이 건물을 인수하고 목포 문태중학교를 신설했으며 정명여학교는 목포시가 인수해 목포여자상업학교를 설립했다. 이 일로 해방 후 두 학교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늦게 문을 열기도 했다.

한편 광주숭일학교는 일본 병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수피아여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미션학교들에서 선교사들이 떠나자 조선총독부에서는 마음대로 학교 건물을 사용했다.

미션병원과 선교사들의 철수

전주 예수병원과 의료 선교사들

호남 지방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등에 차례로 병원이 설립되어 엄청난 사람들을 병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전주선교부에서는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하위렴 선교사가 병원문을 열었으며, 그후 잉골드 선교사가 와 정식으로 청진기를 들고 진료에 임했다.

그후 여천 애양원의 창설자로 널리 알려진 보의사 선교사가 전주 예수병원에 의사로 부임해 전북 지방 최초로 고아원을 세우고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안식처를 마련해 주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