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새문안교회 오장은 원로장로로부터 부친 오형선(1875-1944) 목사님의 애국 및 목회활동 자료를 받은 바 있다. 나의 고향 함양을 비롯 거창 등 서부경남에 일제시대 교회를 많이 개척하시고 독립운동도 하신 훌륭한 애국지사였다. 8남매 중 큰 따님 오중은(1914-1991)의 남편 되는 강성갑(1912-1950) 목사는 사위로서 목사요, 교육자로 큰 빛삶을 남긴 인물이었다. 경남 의령출신으로 어려서 한문공부를 했다.
마산창신보통학교를 마치고 1930년도 마산상고 졸업 후 김해 영유금융조합 서기로 5년 일했다. 그 후에 상경해 연희전문 영문과를 다니며 백낙준 최현배 스승의 자랑스런 제자가 되었다. 다시 일본 경도 동지사대학 신학부에 진학 2년간 다니고 1942년 귀국해 부산 초량교회에서 목회에 열중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김해군 진영읍 농촌으로 달려왔다. 강성갑 목사가 연희전문과 동지사대학 재학 중에 마음에 새긴 신념은 덴마크 농촌교육자 니콜라이 그룬트비히의 신학과 사상에 영향을 받아 강성갑 자신도 기독교 농촌교육에 피와 땀을 쏟기로 한 것이다. 광복과 더불어 진영읍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바로 농촌교육에 몰입했다. 하나님사랑 조국사랑 이웃사랑을 교육목표로 삼고 먼저 복음중등공민학교부터 설립했다. 민족중흥과 농촌경제부흥을 위해서는 성실한 농촌 일꾼 양성을 위해 학교설립하는 교육이 급선무였다. 1947년 6월 21일 3.1학원을 설립하고 이듬해 1월 26일에 강성갑 목사 자신이 교장이 되면서 한얼중학교를 설립했다. 전 연세대 교수 김동길 문상희 같은 우수교사가 학생지도를 잘했다.
마련된 학교부지 6천500평에 강성갑 교장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살후 3:10)”는 성경말씀으로 학생들을 일깨워 가며 진흙벽돌을 학생들과 스스로 만들어 학교교실을 지었다. 진례분교(현 진례중학교), 녹산분교(현 녹산중학교) 등의 분교까지 설치해가며 강성갑 목사는 농촌교육진흥에 온힘을 다 쏟았다. 교육으로 나라일꾼 양성정신은 애국가를 짓고 흥사단을 창단해 교육입국을 부르짖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교육정신과도 교육사상이 일치했다. 노동은 신성하다 부르짖으며 자조 자립정신을 학생이나 농민들에게 교육한 가르침은 박정희 대통령의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정신과도 일맥 상통하는 교육이었다. 농촌경제 활성화와 복음화를 부르짖은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 장로의 농군교육정신도 엿볼 수 있었다. 부산대학교(국립 부산대 전신) 교수직도 그만두고 한얼중학교 중심의 복음화 농촌경제 활성화 민족중흥의 교육 등에 강성갑 목사는 온 힘을 다 쏟았다. 그리고 학교운영에도 소사, 미장이, 목수, 이발사까지도 다 선생으로 부르게 하며 월급도 같았다. 당시 6.25전쟁은 낙동강 전선이 최후 방어선이다. 나라에서 국민의 불순분자 공산주의자 명단을 읍장이나 경찰지서장에게 보고 지시를 내렸다. 강성갑 목사의 평소 공무원의 부조리한 현실비판에 앙심을 가졌는지 경찰지서장은 한얼중학교 교장 강성갑과 이사장 최재시도 공산주의자 명단에 넣었다. 1950년 8월 2일 낙동강 수산교 모래벌에서 지서장의 지시를 받은 모병관들이 죄없는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최재시 이사장이 강성갑은 중학교 교장이요 목사라 해도 기어이 살해하려 해 하나님께 무지한 군인들의 만행도 용서를 빌고 자기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며 38세 나이로 순교당했다고 했다. 헌시적인 강성갑 교장을 잃은 한얼중학교 2대교장으로 기독교장로교 김재준 강원용 목사 추천을 받고 제주도에서 건너온 조향록(1920-1910) 목사가 취임했다. 학교를 크게 발전시키고 서울 종로3가 초동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1954년 5월 27일 제자들이 한얼중학교 교정에 학교설립자 강성갑 교장선생님 동상 제막식을 성대하게 베풀었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