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에서 복음과 독립정신 전한 순교자
공산당의 총칼 앞에서도 기도하며 사명 지켜
1929년 1월경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그해 3월 22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한경희 목사의 수감 중에 자녀들을 셋이나 잃었다. 첫째 아들 한정옥은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었다. 그는 삼원보를 중심으로 공산활동에 빠져 민족주의자들에게 수차례 테러를 자행했다. 어느 날 그는 회의 도중 한 청년에 의해 피살되었다. 셋째 한병옥도 삼원보에서 죽고, 딸 영옥도 치료를 못 받아 죽었다고 했다.
한편, 한경희 목사가 수감되어 있을 때인 1931년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지역을 장악하고 만주국을 세웠다. 이로 인해 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동포들의 고초는 한층 더 심해졌다. 또한 길림성의 가장 동북쪽에 있는 호림(虎林), 요하(饒河), 수원현(綏遠縣) 등에는 기독교 전도가 시작되기는 했으나 전임 사역자를 구하기 어려워 교회의 운영 및 설치에 큰 애로가 있었다.
출옥 후 한 1년 동안 의산노회의 창성교회에서 목회하던 그는 결국 다시 만주로 되돌아갔다. 지원하는 성직자를 찾기 매우 어려운 이 지역의 사역에 한경희 목사는 담대하게 자원했다. 만주 동포를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1933년 겨울, 총회 전도부 파송 목사로 다시 간 것이다. 이때 친구들은 그 일대는 공산당과 비적들이 많아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라를 잃고 해외에 망명하여 슬퍼하는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여 새 생명을 주고 위로하며 독립정신을 키워주는 만주선교가 나의 사명이다.”
전도목사로 파송된 한경희 목사는 1934년 1월 북만주의 밀산현 일대에서 한인 동포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는 데 헌신했다.
그러던 1935년 1월 1일, 그는 교인 4명과 함께 북만주 호림현 지방교회 순방길을 떠났다. 매서운 겨울의 추위와 마적,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으로 인한 혼란을 걱정하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도들을 버려진 양으로 버려둘 수 없다고 해 호림, 요하, 수원현 지역교회를 방문했다.
한경희 목사는 1월 4일 오소리강(烏蘇哩江) 소목하(小木河) 지점에서 40여 명의 공산당원에게 체포되었다. 한경희 목사의 큰아들 청옥이 공산당원이었으니 혹시 이들이 한경희 목사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아들은 악명 높은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경희 목사를 붙잡고 일본의 스파이 누명을 씌웠다. 그리고 그 추위 속에서 두 시간 남짓이나 갖은 악형을 다하며 고문을 가했다.
아무 증거도 찾지 못한 이들은 결국 그 두꺼운 얼음을 사람들을 집어넣을 만큼 깨고, 그 속에 한경희 목사를 그대로 던져 넣으려 했다. 그러나 다른 일행이 도망하려 하자 총살하고 그 시체를 얼음물 속에 집어넣었다. 그때 일행 중 유일한 생존자 이낙섭이 증언하기를, 한경희 목사는 “오, 주여, 이 작은 영혼을 받으소서”라고 세 번 외쳤다고 한다.
만주 벌판의 살을 베는 듯한 추위와 찬바람이 곡하듯 흘러갔다. 결국 그의 시체는 찾지 못했다.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이역 천만리에서 외롭게 지내는 우리 동포들을 위해 한경희 목사는 그렇게 영광의 하늘나라로 간 것이었다. 한경희 목사는 55세에 순교했다. 한경희 목사의 순교는 조선 전역의 기독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다니엘의 결심”이라는 기록된 설교를 남겼다.
해방 후 공산주의자에 의해 두 아들을 잃고, 마침내 6·25 전쟁 때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순교한 손양원 목사는 설교하면서 한경희 목사에 대해 자주 말했다. 손양원 목사가 신사참배 거부로 1941년 11월 4일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재판받을 때 판결문에도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