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 영적으로 온전함을 향한 사도 바울의 강한 열망과 분투 노력을 육상 경기에 비유하고 있다.
경주자가 이기기 위해선 정신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 우화(寓話) <토끼와 거북이>에 나오는 바와 같이 토끼가 낮잠을 자는 동안 거북이는 쉬지 않고 목표를 향해 기어갔다. 토끼가 잠에서 깨어보니 때는 이미 늦어서 거북이는 벌써 목표 지점에 도달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역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바울 사도는 구원을 확신했다. 구원의 확신은 인간의 노력을 배제(排除)하지 않는다. 확신은 하나님의 약속을 끊임없이 의지하는 것이다. 죄의 두려움과 의심에 대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사도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완전하게 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완전’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다.
‘죄인 중의 괴수!’ 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신을 생각하면 가끔은 가슴이 뛰고 설렌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 칭찬을 받을만한 삶을 더욱 살고 싶어진다. 순종하는 자녀들이 고맙고 예쁘듯이 나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 순종하는 삶으로 칭찬을 받고 싶어진다.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모두가 다 내 능력을 초월한 것이었다. 사도 바울조차도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라고 고백한다.
말씀 앞에서 사는 날 동안 부지런히 힘써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날마다 향상과 진보를 위해 힘써야 하겠다. 성령님과 교제가 단절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 안에 성령님을 모시고 동행해야 한다. 나같이 비천(卑賤)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주셨다. 내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티끌만큼도 없다. 실로 벅차오르는 은혜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요 긍휼히 여겨 주셨음이다.
성모 마리아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하나님을 찬송한다. 자신을 가리켜 ‘비천한 계집종’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주님의 모친, 그 거룩한 겸손을 본받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을 비천하게, 무능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얼마나 어리석으며 얼마나 교만한가! 나같이 비천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진실로 자신을 비천하게, 무능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다.
죄악이 관영(貫盈)하는 악한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사람을 남겨 두신다. 예수님 당시에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올라왔을 때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다. 죄악의 소돔 땅에는 룻, 악한 아합왕 때는 오바댜, 암흑 같은 바벨론 포로 시대에는 다니엘, 어리석은 왕 시드기야 치세 때는 예레미야가 있었다. 엘리야 시대에도 아합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 명을 남겨 두셨다. 예수님이 계시던 당시에 결혼 생활 7년 만에 과부가 되어 84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은혜로 모든 것을 이겨낸 여선지자 안나도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을 향해 좇아가는 것은 불굴(不屈)의 정신 자세와 분투(奮鬪)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목표(푯대)를 향해 상급을 받기 위해 달려가는 믿음이다. 경주자는 상급(賞給)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도는 힘쓰고 애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요한 웨슬레가 임종을 맞아 가족들 앞에서 했던 유언이 우리를 격려해 준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