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초창기 국민학교 국어교과서 만든 박창해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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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를 역임하신 박창해 교수님 사랑 많고 어지신 분이다.

나와 최만이 친구에게 당신의 봉급에서 등록금을 빌려주신 은사이다. 1916년 6월 18일 중국 지린성 용정에서 출생했다. 만주 용정중학교를 윤동주 시인과 한학년 선후배로 다녔다. 그리고 연희전문 문과 선후배가 되었다. 1938년도 연희전문에서는 일제시대 우리나라 문법의 경전 최현배 교수의 ‘우리말본’을 윤동주와 함께 배웠다.

박창해 교수 학점은 알 수 없으나 윤동주와 그의 고종사촌 형 송몽규 그리고 허웅(전 한글학회 이사장)은 까다로운 외솔 교수 학점 100점을 받았다. 박창해 교수는 연세대 교수가 되면서 최현배 교수를 잘 모셨다. 최현배 교수가 미군정 문교부 일을 보실 때 편수사 일을 맡은 박창해 교수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국어교과서를 직접 만드셨다. 서구 언어이론을 도입해 음성언어 중심으로 어린이들이 쉽게 국어책을 읽게 만들었다. 먼저 어린이 국어교과서에 친근감 있게 철수, 영희, 바둑이가 나오는 사람 이름 개이름까지 넣어 재미있게 국어책을 만든 것이다. “바둑아, 바둑아, 나하고 놀자” 식의 소리와 글자, 단어 문장을 동시에 가로놓는 방식으로 국어교과서를 새롭게 만들어 어린이 국어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가갸거겨 글자학습의 불편을 없애고 소리말 효과를 살려 국민학교 국어교과서를 실용성 있게 만들어 크게 우리말 우리글 익히는 어린이 국어교육에 박창해 교수의 지혜와 애쓴 노력이 남달리 컸던 것이다. 6.25 무렵 백낙준(1895-1985) 박사가 문교장관직에 있을 때 젊은 박창해 교수는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1952년도에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부임해 언어구조론 강의를 했다. 1959년도에 한국어학당(현 언어연구원)을 개설해 초대학감을 지내며 외국 선교사들의 우리말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학감실 입구에 큰소나무 나무토막을 세워두고 내가 늘 뵙는 외솔 최현배 스승이라고 말씀했다. 4.19 학생혁명이 일어났던 8월 여름방학 때 나와 김무헌, 최만이, 백봉자 네 학생을 국민학교 교과서 어휘빈도수찾기 일을 시켜주셨다. 그 당시 정법대 안에 한국어학당이 있었다. 나는 박창해 교수의 국어구조론 두 학기를 들으면서 지금의 치과대학 근처에 있던 교수사택에 자주 들러 차를 마셨다. 사모님이 커피를 늘 주전자 가득 끓여 놓으셨다. 가끔 근처 사시는 신과대 한태동(1924-2025) 교수가 놀러오셨다. 나는 북아현동 이애내 숙대음대교수댁에서 무보수 두 달 입주 가정교사한 일로 대화를 나누었다. 원래 그분 친정이 고리대금업자 집안이었고 인색한 집이라 했다. 이애내 교수는 안 아무개 음악가와 부부였으나 이혼녀로 살고 있었다. 이애내 교수집과 조금 인척이 된다시며 그 때 한태동 교수가 박창해 교수댁에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4.19 혁명 이후 연세민주화를 부르짖는 김윤경 정석해 교수 중심 농성파 교수와 학교운영의 실권을 쥔 백낙준 중심의 이사진파가 한 때 치열하게 대결했다. 그 때 박창해 교수는 중립을 지켰다. 슬기로운 처세였다. 내가 졸업하자 한국어학당 강사로 일하라 하셨으나 해병대에 입대하고 군복무를 먼저 마쳤다. 대신고교 재직시 연세교육대학원에 입학하라고 권면하셔서 나는 입학하고 졸업했다. 졸업기념 사진도 함께 찍었다. 58입학 우리 국문과 동기들을 많이 사랑해 주셨다. 우리와 식사도 자주하시던 박 교수님은 미국에 가셔서 한 20년 계시다 귀국하셨다. ‘현대 한국어 통어론 연구’ 대저서를 내셨다. 이가원 교수가 지어주신 산여(山如) 아호를 기뻐하셨다. 2010년 1월 14일 한양대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인자하신 모습 지금도 눈에 선히 그립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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