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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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미션학교의 복교와 지역사회의 신앙 회복

이미 그의 친절과 의술을 안 주민들은 서로 그와 악수를 하고 싶어서 그의 손을 붙잡고 흔들어 대기도 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그런데 이러한 일도 잠시뿐이었다. 순천 경찰서에서는 병원 구내에 신사당을 만들라고 아우성이었다.

“서장님,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신사당을 병원에 세우라고 말을 합니까. 절대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 일로 충돌이 자주 생기자 일본은 아예 선교사들을 추방시킬 계획을 세웠다. 로저스 선교사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스스로 문을 닫고 순천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순천 지역 교회 지도자들이나 일반 시민들은 그의 떠남을 아쉬워했다. 로저스 선교사는 혹시라도 주민들이 자신을 전송하기 위해 나왔다가 발각이 되어 일본으로부터 스파이 죄목이 붙여질까봐 조용히 떠났다.

미션학교 복교와 선교사 내한

광주 숭일중·고등학교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한반도 젊은 청년 학도들을 천황군이라는 미명하에 전국 각처에서 모집해 갔으며, 매일같이 역전마다 천황군 전송식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공립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은 수업은 제쳐놓고 매일같이 방공호 파는 일과 산에 올라가 비행기 기름을 만든다면서 소나무에서 송진액을 따오게 하기도 했으며, 군마에게 먹이를 주어야 한다면서 들녘에 나가 말이 먹을 수 있는 풀을 베게 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매월 1일과 15일에는 동네 신사나 학교 신상에 올라가 일본 천황과 천황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행사를 했으며, 교회는 매주일마다 동방 요배를 실시한다면서 일본 천황이 살고 있는 일본 동경 쪽을 바라보고 경배를 하게 한 후 예배를 드리게 했다. 이 일이 미션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에게는 곤욕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황국 신민 서사를 복창해야 하고 때로는 우상인 신사에 가서 참배해야 하는 일들 때문에 신앙의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어떤 학생들은 아예 학교를 포기하고 집에서 기도하면서 부모의 일을 돕기도 했다.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전쟁이 종결되었다고 말하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곧바로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가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때 학교를 빼앗겼던 광주 숭일학교 동문들은 즉시 일본 병사로 쓰고 있던 숭일학교에 가 보았지만 일본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패잔병들의 모습을 보고 돌아갔다.

이때 동창회원 중 김윤식, 김수열 등은 곧 숭일학교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책임자를 만나 교실을 비워 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동창들을 중심으로 해서 숭일학교 재건위원회를 조직했는데, 그 준비위원으로는 김윤식을 비롯해서 김현구, 김수열, 정두범, 이문환, 정국훈, 장남구, 김경태 등이었다.

이들은 곧 9월부터 학생 모집을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지 않게 많은 학생들이 모였다. 그리고 일제시대의 차별 교육 아래에서 민족성이 강했던 가정의 자녀들이 입학을 했다.

그러나 이미 중학교를 졸업했어야 할 사람들도 좋은 기회라면서 숭일중학교에 모여들었다.

드디어 1945년 11월 21일 오원기념각에서 복교 기념 예배를 드렸다. 초대 교장으로 김용수가 취임했으며, 교감으로는 김현승, 일반 교사로는 김수열, 김현구, 오창흠, 김완석, 김경태 등이 맡았다

광주 수피아여자중·고등학교

1937년 폐교 이후 8년 오원기념각에서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광주 수피아여학교는 조아라를 중심으로 동창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수피아여학교는 그 좋은 교사를 광주의학전문학교에서 사용하고 있기에 쉽게 접수하기에는 어려웠다. 그리고 미군이 광주에 진주하자 미군 주둔 병사로 사용하게 되어 할 수 없이 동창들은 몇 차례 모임을 갖고 숭일중학교 교사 일부를 임시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동창회에서도 곧 학생을 모집했으며, 드디어 1945년 12월 5일 김필례를 교장으로 선임하고 교원 7명과 학생 100여 명이 모여 역시 오원기념각에서 복교식 및 입학식을 거행했다. 이때 동창회 회장과 김필례 교장, 그리고 초대 미군정 전남지사였던 최영욱 박사를 앞세워 미군이 사용하고 있는 교사를 접수하고 수피아여학교 옛 동산으로 옮겨 갔다.

1947년 6월 13일에는 백영흠 목사가 제7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1948년 10월 14일에는 유화례 선교사가 교장으로, 1949년 9월 1일에는 박정근이 교장으로 취임했다가 다시 한국 전쟁이 일어나던 해 12월 5일에 다시 유화례 선교사가 교장으로 취임했다. 

학제의 변경에 따라 중·고등학교로 분리되면서 과거 중학교 1~3학년은 수피아여자중학교, 중학교 4~6학년은 고등학교 1~3 학년으로 각각 변경했다. 1957년 8월 28일에는 제11대 교장으로 정부가 취임했다.

순천 매산중·고등학교

순천선교부 소속으로 사역했던 구례인 선교사는 1945년 10월에 순천에 도착했다. 더욱이 순천 지역에 있는 교계 지도자들이 일본의 탄압에 의해 전 교역자가 구속되었던 일이 있었다. 이러한 관계로 다른 지역에 비해 해방의 기쁨은 남달리 감회가 새로웠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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