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신학박사 남궁혁, 첫 한국인 교수돼
독립과 신학… 두 길 열어간 김마리아와 남궁혁
그러던 중 조직원의 배신으로 1919년 11월 28일 김마리아를 비롯한 임원진 등 52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북도 경찰국으로 압송되어 온갖 고문을 받았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김마리아 같은 사람이 10명만 있다면 한국은 이미 독립을 했을 것이다”라고 하며 불굴의 독립정신을 가진 김마리아를 높이 평가했다.
남궁혁은 1918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22년 제15회로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라남도 광주의 양림교회(楊林敎會) 혹은 광주제일교회(第一敎會)를 1년간 시무했다. 1922년 4월 선교사들의 권유로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 신학교 3학년으로 편입학했다. 1년 후 졸업하고 1924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1928년 서울 YMCA 소속 외국인 선교사들이 발행한 <The Korea Mission Field>에 유학 경위의 일단을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로버트 녹스(Robert Knox) 목사는 ‘내 친구 남궁혁’이란 글에서 신의 기적을 체험한 남궁혁의 인생관이 바뀌었다고 서술했다.
“당초 남궁혁은 가족과 헤어지는 유학 생활에 뜻이 없었다. 어느 날 광주와 순천을 오가던 만원 버스가 협곡에서 60m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승객 대부분이 큰 부상하는 사고였으나 남궁혁은 뒤집힌 차량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 현장에서 즉사할 수도 있던 참사를 모면한 것이었다. 생명을 부지하게 된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특별한 사명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 길로 사십 대에 유학했다.”
나중에 부인 김함라는 광주에 홀로 남아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있었고, 훗날 서울 남대문교회의 여전도회를 만들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주일학교 진흥에 힘써 주일학교 진흥부 전남노회 위원장과 주일학교 연합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조선 주일학교 대회 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4년 스코틀랜드 글라스고에서 열린 세계 주일학교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으며, 1922년에는 《최신 유년 주일학교 교수법》을 번역 출판했다.
남궁혁의 영어 실력은 천부적이어서 미국 사람보다 우수하다는 평을 받았다. 선교사들의 권유로 미국에 가게 된 그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이어서 리치몬드 유니온 신학교 박사 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한국의 신학박사 1호였다. 박사 학위는 1927년에 받았다.
남궁혁은 성경주석을 번역하고, 1928년 <신학지남>(神學指南)의 편집 책임을 맡았다. 그때 그의 편집을 돕던 김인서, 김창덕, 강흥수, 김재준과 같은 학생들은 향후 한국교회를 이끌어나가는 괄목할 만한 인물들이 되었다. 그는 훌륭한 제자들을 이끌어갔다.
그는 43세에 외국인들이 교수하던 평양신학교에 한국인 첫 교수가 되었다. 선교사들만이 한국 신학교육을 감당한다는 생각이 바뀌는 때였다. 우리도 선교사들의 반열에서 똑같이 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세계에 부상하고 있다는 함성이었다.
그는 옹졸한 학자가 아니었다. 명문가 양반답게 인격적이고 후배들을 이끌어주고 길을 열어주는 아량이 넓었다. 박형룡 박사도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으로, 그가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을 때 평양신학교의 교수직을 마련했고, 김재준 박사가 가난한 문사로 떠돌 때 사재로 생활을 도왔고, 이성휘, 송창근 박사의 후원자로 진로를 열어줌으로 한국교회에 활기를 찾게 하는 역할을 했다.
한국인으로 처음으로 미국에 유학 가서 평양신학교에 최초 교수로 부임했던 남궁혁 박사는 가히 한국 최초의 거물급 신학자라고 할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눌서(Reynolds, William Davis, 李訥瑞) 선교사를 배출한 남장로교의 버지니아 리치몬드 유니온 신학교에서 1927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한국인 최초의 신학박사 학위였다. 백낙준 박사가 예일대학교에서 1926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그것은 한국교회사로 받은 역사학 박사였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