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이름도 빛도 없이 도와주신 목사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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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원금을 계기로 찬송가를 마련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 교회 저 교회를 계속 쉼없이 방문하던 중에 동신교회를 다시 찾아가게 되었다. 당시 부목사님으로 재직하고 계셨던 허재철 목사님과 깊은 상담을 나누었다.

허 목사님께서는 동신교회에서 영구적인 후원을 받으려면 김세진 목사님을 설득하라고 했다. 그 비전은 자꾸 찾아와서 귀찮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귀띔해 주셨다. 그러던 중에 김세진 목사님은 은퇴하시고, 한기원 목사님이 후임으로 부임하셔서 당회장이 되었다. 또 하나의 넘어야 할 장벽이 생긴 것이다.

시각장애인후원회가 조직되다

어느 날 김세진 목사님을 찾아갔더니 새로 부임한 한 목사님과 상의하라고 말씀하셨다. 한 목사님께 우리의 선교사역에 관한 일을 이해시킨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처럼 시간 있을 때마다 찾아가서 하나하나 말씀드렸다. 한 목사님께서는 의외로 빨리 이해하셨다. 권위를 내세우는 분이 아니라 소탈하고 겸손한 분이었다. 대화를 하다보면 점심 시간이 될 때가 있었는데, 주위에서 싸구려 냄비 우동을 사서 같이 나누어 먹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한 목사님께서는 정식으로 이들을 위한 후원회를 만들자고 제의하셨다. 그래서 1976년에 후원회를 구성하고, 1978년에 아시아 시각장애인 선교대회를 개최했다. 1981년에는 영락교회와 세종문화회관에서 시각장애인을 돕기 위한 대집회와 음악회를 열어 서울 시내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리고 동신교회에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잔치를 열었다. 그때 김세진 목사님께서 감명을 크게 받으셨다. 다음해 1월 나를 부르시더니 20만 원을 주시면서 생활하는 데 쓰라고 하셨다.

김 목사님께서는 3~4년 간 그렇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나를 도우셨다. 그러나 김 목사님께서 주신 돈을 한 번도 나의 가정생활에 사용한 적이 없다. 모두 나보다 더 어려운 형제들을 위해 썼다.

먼저 가신 김 목사님, 한 목사님 등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은 나의 가슴에 깊이 남아 있다.

또 한 분의 고마운 분이 있다. 1970년, 여권과 비자를 받아 외국을 간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나는 꿈에 그리던 미국을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왕복 여비가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당시 5~6만 원의 큰 돈을 마련하는 것은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지혜를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던 중 중학교 시절 나에게 꿈과 용기를 주신 김형남 회장님이 생각났다. 그 분은 숭실대 총장과 이사장을 역임하시고 일신방직 회장으로 계셨다. 내가 어려웠을 때 종종 찾아가며 용돈을 주머니에 넣어 주시며 늘 나에게 인정을 베풀어 주신 분이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기도를 마친 후 서소문에 있던 사무실로 김형남 회장님을 찾아갔다. 정중하게 인사드리고 자리에 앉자 회장님께서는 “김 목사, 뭐가 필요해?” 하고 물으셨다. 나는 “예. 제가 일주일 후에 미국을 가려 합니다” 하자 회장님께서는 “여비가 필요하겠군” 하시며 메모하신 후 직원을 불러 그 액수만큼 가져오라고 하셨다. 나는 그 금액이 얼마인지 궁금했다.

그분은 비행기표 값은 묻지도 않으시고 30만 원을 주셨다. 그 당시 30만 원은 지금 500만 원 가치가 되는 큰 금액이었다. 얼마나 고맙고 감격스러웠는지 모른다. 받아 가지고 복도에 나와서 벽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그 후에도 명절 때면 꼭 찾아가서 세배를 드리곤 했다. 이처럼 귀하신 분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철아 내 몫까지 열심히 살게

1981년 10월 어느 주일날, 나에게 큰 충격을 준 시각장애인 소년을 만났다. 김수철.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뇌종양을 앓아 수술을 받았으나 후유증으로 실명했다. 활발하게 뛰놀던 그 모습은 어디로 가고 까맣게 꺼져 버린 눈동자에는 어두움만이 가득했다. 그런 그를 위로해 주고 꿈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산대 교수요, 형들은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한 수재들이었다. 인간적으로는 부러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그에게 실명이라는 아픔이 찾아온 것이다. 실명한 후 그는 부산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점자를 배워 서울중학교에 입학했다. 플루트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안타깝고 답답할 때마다 플루트로 그의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러다 보니 플루트를 꽤나 잘하는 아마추어 연주자가 되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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