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장로교서 이어진 호남기독학원의 발전사
학교법인 호남기독학원과 미국 남장로교 유지재단
학교법인 호남기독학원은 유지재단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를 그대로 인수해서 1962년 10월 4일 유지재단 호남기독학원으로 설립 변경하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재단이 형성되기까지는 미국 남장로교 소속 교회 교인들의 헌금과 독지가들의 특별헌금으로 전라도에 땅을 매입하고 그 땅 위에 학교 시설을 만들면서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해왔었다.
그런데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전라도 지방에 널려 있는 학교는 물론 각 지역에 있는 병원, 성경학교, 선교사들의 주택과 선교회 사무실이 있는 건물을 관리했다. 그래서 재리에 밝은 타마자 선교사는 대지와 건물 대장을 하나씩 챙기면서 그 어려운 한문과 일본어, 그리고 한글 등을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관공서를 드나들면서 재단 설립에 필요한 모든 서류를 준비하게 했다. 그렇게 까다로운 서류를 잘 준비해서 당국에 제출하고 유지재단을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도록 허락을 얻었다. 이러한 일을 해냈던 타마자 선교사가 조선 총독부에서 변호사 자격까지 받았다고 한다면 그의 이론과 일처리하는 일이 얼마나 세밀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앞에 두고 1940년 한국에 있는 모든 외국인을 강제로 철수시켰다. 그래서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도 그리운 제2의 고향 전라도 땅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타마자 선교사는 재산을 지켜야 한다면서 몇 차례 출국 명령이 나왔지만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광주경찰서 고등계 형사 몇 사람이 타마자 선교사 집에 찾아왔다.
“만일 당신이 떠나지 않으면 당신은 당장 구속입니다.”
이렇게 몇 마디의 말을 남겨 놓고 떠나 버렸다. 그 후 며칠이 지나자 또 고등계 형사가 왔는데 무조건 경찰서로 가자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타마자 선교사는 고등계 형사에게 이끌려 광주경찰서 유치장으로 안내를 받고 말았다. 얼마 후에 험상궂은 형사가 나타나 취조를 했다.
“선교사님, 좋은 말로 할 때 선교부의 모든 재산을 포기한다고 여기 각서를 쓰고 나가시오.”
타마자 선교사는 기가 막혔다.
“여보세요, 우리 선교부의 재산은 일본법에 의해서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법인 허락을 받은 재산입니다.”
“선교사님, 그러지 마시고 선교사님이 재단 이사장이니까 여기 포기 각서에 도장만 눌러 주면 됩니다.”
이때 형사들은 타마자 선교사에 대한 마음을 읽어 보지 못했었다.
“형사님, 제가 법인체 대표 이사장이지만 선교부의 재산을 제 마음대로 못합니다. 이 재산을 처리하려면 이사회를 개최해야 하는데 이사들이 모두 출국해 버렸습니다. 저로서는 이 일에 대해서 혼자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형사들은 고함을 지르면서 타마자 선교사의 기를 꺾는 데 힘을 모았다. 그리고 다시 유치장으로 끌고 들어가 버렸다. 이때 타마자 선교사는 하나님께 더욱 뜨겁게 기도하면서 다니엘과 같은 믿음을 달라고 호소했다. 몇 날을 고통 가운데 지내고 있는데 유치장 간수가 서장의 면담 요청이라면서 타마자 선교사를 서장실로 안내했다. 서장은 일본어를 몇 마디 하고는 통역원으로 하여금 한국어로 말하게 했다.
“서장님, 이 선교부 재산은 선교부의 재산도 아니고 제 개인의 재산도 아닙니다. 이 재산은 하나님의 재산입니다.”
이에 서장도 두 손을 들고 말았다. 타마자 선교사는 다시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1개월 정도 지나서 광주형무소로 이감되고 말았다. 거기에는 뜻하지 않게 담양 지방에서 사역했던 많은 전도사들이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으며, 순천노회에서도 많은 목사, 전도사들이 불경죄 죄목으로 끌려와 있었다. 참으로 타마자 선교사는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그는 유치장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기도를 하기 시작했으며, 그때부터 다니엘서를 읽으면서 암송하기 시작했다.
타마자 선교사의 뜻을 안 일본 고등계 형사들은 할 수 없다고 판단한 다음 활동 제한을 하면서 석방시켰다. 이때 타마자 선교사는 사랑하는 가정에 돌아왔지만 앞날이 걱정이었다. 일본 고등계 형사들은 강제로라도 재산을 빼앗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하루는 빈 선교사 주택을 경매해서라도 타마자 선교사를 추방하려고 했지만 이때마다 그는 재산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강제로 강탈한 일본은 망할 것이라고 소리를 지르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자 일본과의 포로 교환에 의해 타마자 선교사 부부와 유화례, 도마리아 선교사는 1942년 4월에 출국하게 되었다. 그는 고국에 돌아가서도 전라도 땅에 널려 있는 선교부의 재산을 잘 지켜 달라고 몇 번이고 기도를 했다.
그가 미국에 도착한지 3년 만에 뜻하지 않은 전승의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그래서 그는 선교부 재산을 찾아보고 싶어서 다시 광주에 도착해 빼앗겼던 재산을 찾는 데 안간힘을 쏟았다. 그리고 해방된 한국 백성들에게 새로운 시설을 갖고 선교 활동에 임해야 한다면서 계속 재산을 증식해 갔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찾아 놓았던 목포 영흥중학교가 기장과 예장의 분열로 어려운 시련에 빠지고 말았다. 이때 기장 측에서는 영흥중학교 건물과 대지를 기장 측과 자매 결연을 맺고 있는 캐나다연합교회 선교부와 협약해 남장로교에 5천 달러를 준 후 그 학교를 양도받았다.
그후 얼마 있다가 또다시 예장 통합 측과 합동 측의 분열이 야기되고 말았다. 바로 타마자 선교사가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많은 애착을 가졌던 광주 숭일중·고등학교였다. 역시 학교 대지와 건물을 예장 합동 측에서 점령하고 있었다. 이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서 많은 애를 썼지만 결국 숭일중·고등학교는 합동 측으로 이관되면서 좋은 교육 기관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광주 숭일중·고등학교는 그 어려운 가운데서 정든 양림동 교사를 처분하고 동운동으로 이전했으며, 다시 일곡동으로 옮겨 좋은 시설을 갖고 새로운 일곡동 시대를 열어 갔다.
1962년 10월 4일에는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 유지재단으로 운영되어 왔던 전라도 지방에 있던 재단을 교육 재단으로 독립시키고 ‘재단법인 호남기독학원’으로 재단을 변경했다. 초대 이 사장에는 김성배 목사가 선임되었으며 이사로는 김형모, 김윤식, 정부, 장평화, 주형옥, 한미선(선교사), 이봉환, 조세환, 김종하, 최섭이 선임되었고 감사는 조준현, 권익수(선교사) 등이었다. 다시 1964년 4월 1일에는 문교부 법에 의해 재단법인을 학교법인체로 명칭을 변경하고 ‘학교법인 호남기독학원’으로 했다. 1966년 11월 15일에는 기독병원간호전문대학을 설립했으며, 1971년 12월 23일에는 광주 보건전문대학을 설립했다. 1973년 12월 19일에는 전주 기전여자전문대학, 군산전문대학을 각각 설립했다. 그리고 1985년 4월 28일에는 기독병원간호전문대학, 광주 보건전문대학, 전주 기전여자전문대학 3개 전문대학을 하나로 묶어 ‘학교법인 전라기독학원’으로 명명했다.
그후 법인의 수익성도 좋아지고 모든 학교들이 계속 발전해 가자 1983년 12월 30일 순천 매산고등학교 여학생을 따로 떼어서 순천매산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렇게 발전해 갔던 학교법인 호남기독학원은 5개 중학교, 6개 고등학교, 1개 군산전문 대학을 운영하고 있으며, 군산전문대학은 1974년 4월 1일 학장으로 취임했던 도문규 목사가 현재까지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중견 지도자를 양성하기에 온갖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동안 ‘전라도가 고향이지요’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주 –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