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신앙의 자리] 종로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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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조선선교의 숨은 주역, 가우처(J. F. Goucher)”

보이지 않는 헌신으로 한국 감리교회의 문을 연 선교적 비전가

가우처(J. F. Goucher)

가우처(1845~1922)라는 이름은 낯이 설다. 하지만 한국감리교회의 역사에서 그의 이름은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한국감리교회사와 관련해서 조금만 관심을 갖는다면 이내 그의 이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반 신자들은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만큼 한국교회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숨겨진 사역자들이 많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적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북감리교회가 조선에 선교를 시작하게 되는 데 결정적인 동기와 역할을 한 것이 그였다는 사실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큰 이유다. 적어도 감리교회 신자라면, 그리고 한국 교회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그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감리교회 신자들만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가 미국 감리교회가 조선 선교에 나서도록 함으로써 아펜젤러를 필두로 선교사들을 파송해서 조선 선교를 시작했기 때문에 한국 교회사 전체에서도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인물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는 미국 감리교회에서도 많은 일을 한 사람이다. 그는 1845년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났고, 1869년에 감리교회 목사가 되었다. 그는 특별히 처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던 사람으로서 미국 서부지역 175개 교회가 예배당 건축을 할 수 있도록 경제적인 지원을 했으며, 그 자신이 직접 볼티모어여자대학을 설립해서 20년간 학장으로 일을 했다. 후에 볼티모어여자대학은 가우처대학으로 명칭을 바꾸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그가 볼티모어대학의 학장으로 일하고 있던 1883년 9월 어느 날 워싱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그의 눈에 한 동양인 일행이 들어왔다. 그들은 견미사절단(보빙사절단)으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미국을 공식 방문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가고 있던 민영익을 비롯한 유길준, 서광범, 홍영식 등 그 일행 11명의 특사들이었다. 가우처의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특별하게 각인되었다. 낯설고 행색이 기이했던 조선 사람들을 처음으로 접하는 동안 가우처의 마음에는 뜨거운 그 무엇이 느껴졌다. 미지의 나라 조선을 알게 되고 미국 교회가 조선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잠시지만 기차 안에서 만난 조선 사람들 일행을 기억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또한 기차에 동승했던 가우처는 거기서 조선을 선교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으로 들었다.

민영익 일행을 경험한 그는 뉴욕에 있는 감리교회 해외선교부에 조선선교를 위해서 무엇이든 빨리 시작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당시 화폐로 2천 달러를 전달했다. 이 헌금을 기금으로 해서 최초 감리교회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가족이 조선에 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또한 그는 조선 선교를 위한 가능성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던 맥클레이(Robert Samuel Maclay)에게 편지를 보내서 조선에 가서 선교 가능성을 타진할 것을 요청했다. 그 편지를 받은 맥클레이는 조선을 찾았고 김옥균을 통해서 고종임금을 만나 선교사 입국을 허락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그는 조선 선교를 위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갖고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단지 선교 기금을 기부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배재학당, 이화학당, 후에는 장로교회의 언더우드 선교사와 뜻을 같이 해 조선의 기독교대학이 연합대학을 만드는 데도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1910년 조선선교 25주년과 배재학당 신축기공식에 참석하는 것을 비롯해서 6차례나 조선을 직접 찾아왔던 인물이기도 하다. 주한 선교사가 아니면서도 당시와 같이 교통사정이 어렵고 험했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여섯 차례나 조선을 찾았다는 것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그가 조선 선교를 위해서 얼마나 열정과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는 현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가 아니면서도 교통이 불편하고 험했던 당시에 태평양을 건너 은둔의 나라 조선을 여섯 차례나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조선 선교를 위해서 얼마나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국과 일본에 선교사들에 의해서 설립되는 학교들을 지원하는 데도 상당한 공헌을 한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처럼, 그를 기념하는 예배당으로 지었던 것조차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 ‘가우처기념예배당’을 찾아보는 사람들에게 아쉬운 마음을 더한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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