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정일선 목사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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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집서 시작된 안악읍교회… 부흥의 역사

정일선 목사, 신사참배 거부•순교적인 삶

북장로회 선교부는 교통이 편리하다는 이유로 1906년에 재령에 선교기지를 세우기로 결정했는데, 만일 이때 안악으로 결정되었다면 안악은 황해도 장로교회의 중심지가 되었을 것이다.

안악읍교회는 김백영(金伯榮) 전도인의 전도로 여러 사람이 믿으면서 시작되었다. 안악경찰서 뒤쪽에 송영기(宋榮基)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의 기와집이 초창기의 안악읍교회였다. 이 예배당을 흔히 ‘귀담뒤 예배당’이라고 불렀다.

이 예배당에서 예배드리고 있을 때 부속학교를 설립해서 운영했는데 이 학교가 발전해서 안신학교(安新學校)가 되었다. 김구 선생의 부인 최준례 여사가 이 학교의 교사로 있었다. 김구 선생이 상해로 망명한 후 모친 곽낙원(郭落園) 여사가 안악에 머물렀는데 정일선 목사와 안악의 여러 교회가 물심양면으로 곽 여사를 도왔다.

초기에 교회 안에 어려운 문제가 있어서 흔들리기도 했으나 이것을 잘 극복하고 부흥하고 발전했다. 정일선 목사가 담임하고 있을 때 그는 열심히 기도하며 성도들을 격려하고 찬송하고 말씀으로 전하니 교회가 크게 부흥해서 교인 수가 500명에 이르렀다. 안악읍교회는 경찰서 뒤에서 시작해서 신장리, 연당, 안신학교 터 등으로 옮겼다.

정일선 목사는 교회가 부흥되므로 자연스럽게 예배당을 건축하자고 성도들을 일깨웠다. 온 성도들이 힘을 합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당을 지어서 정일선 목사가 담임하고 있을 때인 1930년 비석리에 석조 예배당을 신축하고 정착하게 되었다. 정일선 목사는 안악교회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으며, 안악교회에서 16년을 목회했다.

성전 건축은 건물을 크게 건축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성전 건축을 통한 성도들의 신앙 성장이었다. 그리고 성도들이 성전을 향하는 마음이 곧 신앙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성전을 지키기 위해서 목사들이 순교를 각오하며, 성전을 지키는 것은 성도들을 지킨다는 엄청난 내용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성전은 곧 예수의 몸이요, 성도들의 몸이다.

초기에는 쿤스(E.W. Koons: 涒禮彬) 선교사가 안악읍교회를 지도했다. 쿤스 선교사는 황해도 지역 장로교회들을 위해 열심히 헌신했고, 1913년부터는 서울 경신학교 교장으로 교육 선교에 온갖 힘을 쏟다가 일제가 선교사들을 강제추방할 때 한국을 떠났다.

1918년에는 오득인(吳得仁) 목사가 부임했다. 오득인 목사는 1910년대 초기에 조사로 안악읍교회를 섬기면서 교회 안에서 일어난 어려운 문제를 잘 해결하고 교회를 부흥시킨 분이었다. 오득인 목사는 상해 임시정부와 손을 잡고 독립운동에도 힘을 썼다. 그다음에 양석진(梁錫鎭) 목사가 안악읍교회에서 목회했다. 양석진 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 1916년 제9회 졸업생으로, 주로 황해도 일대에서 목회하신 분이었다.

1938년 장로교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므로 조선 장로교회에 지각변동이 일기 시작했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교역자는 목회할 수 없게 되었다. 목사들은 교회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신사참배를 했다.

하지만 정일선 목사는 달랐다. 교회에서 쫓겨나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신사 앞에 절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1940년 안악읍교회에 사표를 내고 안악에서 20여 리 떨어진 연동골로 들어가 그곳 산기슭에 움막을 짓고 은둔생활을 했다. 낮에는 김을 매며 곡식을 가꾸었고, 밤에는 기도하고 성경연구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그를 찾아오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정일선 목사는 잊혀진 존재였다. 오직 주님과의 교제만이 있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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