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벽 3시 40분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면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새벽 6시 10분이면 실로암에 와서 원내 방송으로 환자들에게 기도와 말씀을 전하고 병실을 찾아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희망과 용기를 준다. 그리고 저녁 8시나 9시쯤 집에 돌아와서 다음날 아침 말씀을 준비한다.
이 일을 나는 25년 동안 계속하고 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을 이 땅에 얼마나 두실지 모르나 나는 건강이 허락되는 한 외로운 시각장애인을 찾아다니면서 기도와 말씀으로 위로하고 맛있는 음식도 대접하고 필요한 것을 대가 없이 나눠 주고 싶다. 나는 명예도 욕심도 갖고 싶지 않다. 오직 주어진 이 일에 나의 생명을 바치고 싶다.
인생을 살다보면 행복한 비극도 있고 행복한 아픔도 있게 마련이다. 행복한 아픔은 훗날에 가서 행복한 보람과 기쁨으로 바뀐다는 진리를 나는 경험을 통해서 발견했다.
우리나라는 70~80년대 초까지 경제적 여건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요즘에 바나나는 2~3천 원이면 한 묶음을 살 수 있지만, 그때는 보기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하나에 1만 원 정도의 가격이었다.
나는 80년대 초에 일본에 가서 머무는 동안 바나나를 원없이 먹을 수 있었다. 바나나를 많이 사서 마치 세끼 식사처럼 먹었다. 나는 바나나 30개가 달린 묶음을 사서 손에 들고 귀국했다.
그 당시에는 김포세관 통관이 무척이나 까다롭고 어려웠다. 세관원들이 남녀노소 승객들의 가방을 뒤집어서 철저하게 조사하던 때였다. 내가 지닌 선물이라고는 별것 없었고, 오직 바나나 한 묶음뿐이었다. 다행히도 마침 세관원 중에 새문안교회 교인이 있어서 어려움 없이 통관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바나나를 존경하는 목사님께 선물로 드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바나나를 집에 가져가면서도 한편으로 걱정이 되었다.
그 당시 나의 두 딸들은 어렸다. 첫째가 6살, 둘째가 4살이었는데 간식조차 제대로 사주지 못하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 바나나를 가져가면 분명 어린 딸들은 그것을 달라고 조를 터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스러웠다.
부산 소정교회 목사님은 증경 총회장님으로서 우리 선교가 매우 어려웠을 때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하루 저녁 헌신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그때 한 번의 헌신예배로 1년 예산의 금액을 모금할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용기를 얻었고, 하나님께서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발견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들어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두 딸들은 “아빠, 이 바나나 먹어도 돼?”라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나는 두 딸들에게 “얘야, 이것은 부산에 계신 목사님께 드리기 위해서 사온 거니까 너희들은 다음에 더 많이 사줄게” 하고 아이들을 달랬다. 아마도 어린 두 딸들은 그것이 무척이나 먹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내 말에 순종하며 더 이상 바나나를 달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다음날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한 손에 바나나, 다른 한 손에는 약식을 가지고 부산으로 내려가 기차역에서 목사님의 따님을 만나 전해드리고 그 길로 곧바로 서울로 상경했다.
나는 기차 안에서 곰곰이 생각했다.
‘바나나 하나를 더 사서 사랑하는 두 딸에게 주었으면 어린 딸들이 얼마나 맛있게 먹었을까?’
내가 그때 어린 두 딸이 얼마나 바나나를 먹고 싶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쪽이 아프게 느껴지곤 한다. 하지만 내가 목사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성의껏 대접할 것이라고는 그 길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소정교회는 매년 한 번씩 시각장애인 주일을 지키고, 그 어느 교회보다도 많은 기도와 헌금으로 협력하는 교회가 되었다. 또한 소정교회 목사님은 나의 믿음의 아버지가 되었고, 그분의 자제분들도 형제같이 친밀하게 주 안에서 교제하고 있다.
잊을 수 없는 고아원 생활
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여섯 곳에서 고아원 생활을 체험했다. 어떤 고아원은 아침과 저녁 식사만 주고 점심은 주지 않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떤 고아원은 아침과 저녁 모두 부실하게 제공하는 곳도 있었다.
예를 들면 다 찌그러진 깡통 식기에 꽁보리밥을 담은 밥통을 당번이 타다가 각 방으로 가져다 놓으면 고아들은 빙 둘러앉아서 한 덩어리씩 집어다가 먹었다. 더구나 반찬이라고는 미군 부대에서 공급해준 백소금이 전부였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