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축시대 세상 읽기] 인구 위기에 대한 대응은 총체적이어야

Google+ LinkedIn Katalk +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의 역할은 주목할 만하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초기인 1592년 8월 15일(음력 7월 8일)에 한산도대첩에서 승리했다. 6월 16일의 옥포해전, 7월 8일의 사천해전에 이은 승리였다.

한산도대첩은 임진왜란에서 결정적인 전기였다. 조선 해군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을 펼쳐서 일본 함선 100여 척을 격파했다. 이후 10월 5일에 일본군 본거지인 부산포를 공격해서 100여 척의 함선을 파괴했다. 이로써 조선 해군은 남해안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은 불과 20일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5월 23일(음력 4월 13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병력 1만 8천700명이 병선 700여 척으로 동래에 상륙했다. 이들은 5월 24일 부산진을 점령하고 5월 25일 다대포성을 함락했다.

일본군은 상륙 21일째인 6월 12일(음력 5월 3일)에 한양에 무혈 입성했다. 선조는 6월 9일 새벽 개성을 향해서 피난을 떠났다. 중무장한 일본군은 보급품을 끌고 동래에서 한양까지 20일 만에 주파했다. 오늘날 부산-서울은 국도로 450km가량이다. 한국전쟁 초기 인민군 진군 속도 하루 10km보다 두 배 이상 빨랐다. 가히 파죽지세의 기세였다.

  이순신의 해상 방어와 함께 전주 부근의 웅치 이치 전투, 그리고 진주대첩 승리로 호남은 임란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치(배티재) 전투는 한산도대첩과 같은 날 벌어졌다. 전투는 승리하지 못했으나 일본군의 전라도 침공을 저지했다. 진주대첩은 그해 11월 8일부터 13일(음력 10월 5~10일)까지 벌어져 3천여  명의 군사로 10배 가까운 일본군을 물리쳤다.

이순신의 해상 전투 승리는 일본의 남해안 해상 진출을 봉쇄했다. 전라와 경상 일대의 육상 전투 승리로 호남 곡창지대 방어를 굳히고 의병 근거지를 지켰다. 히데요시의 통신선과 보급선이 끊어지자 일본은 해로로 한양에 군량과 물자를 보급할 수 없었다. 해상과 육상의 승리는 일본의 수륙병진 전쟁 수행 전략을 무력화시켰다.

조영태 고우림 두 학자도 인구 위기에 대한 양면의 대응을 강조한다. 저출생과 고령화에 대응하는 인구 정책도 필요하지만, 국내외 국가 전략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인구 변동에 대한 대응과 함께 국내 정치적 변동과 국제 정세 변화도 인구 위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인구 변동은 혼인과 출산, 사망이 직접 영향을 준다. 외국인과 해외 교민의 국내외 이주도 무시할 수 없는 인구 변동 요인이다. 동시에 한국 사회 전반의 정치 지형과 국제 정세도 인구 변동에 영향을 미친다. 사회를 구성하는 인구의 성격과 구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정치와 경제가 사회의 안정적인 발전에 도움이 될 때 인구 변동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두 학자는 인구를 사회와 경제를 예측하는 변수로 보는 시각에도 문제를 제기한다. 인구가 급격히 변화하는 시대에 인구를 주어진 조건으로 보기 어렵다. 인구가 성장할 때 성장하는 방향성에 기초해서 사회를 전망하기는 쉬우나, 인구가 감소하는 시대에 일어날 일을 전망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 사회가 1983년에 합계출산율 2.06명을 기록하며 저출산 시대에 돌입하고, 40년 이상의 기간에 초저출산 시대, 인구절벽 시대로 나아가고 있지만, 인구 감소를 일시적 현상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 두 학자의 지적은 한국교회의 교세 감소 대응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부흥 전략을 세워서 교세 증가를 시도하는 일면적인 대응과 함께 총괄적으로 변화에 대응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변창배 목사 

 전 총회 사무총장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