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신앙의 자리] 종로 (21) 기억되지 못한 중심, 승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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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모여 역사를 움직인 3·1독립만세운동의 또 다른 발상지

승동교회 ④ (서울중앙교회)

승동교회를 찾아보노라면 특별히 한국 근대사와 장로교회사에 있어서 지나칠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승동교회를 뒤로 하기 전에 마련되어있는 승동교회의 역사자료관을 찾아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비록 좁은 공간이지만 승동교회의 역사와 함께 지금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역사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들어서 선교 초기에 형성된 교회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승동교회는 한국교회사에 많은 사건과 이야기를 남긴 교회이기에 자료관은 더 특별하다. 근년에 신사동길 쪽에 건물을 매입해서 승동교회130주년기념관을 만들었고, 그 위층에 자료관을 옮겨놓았다.

특별히 백정들의 교회라는 별칭을 들어야 했던 역사는 신분(계급)사회였던 조선에 기독교의 평등사상이 무엇인지를 실증해주는 계기가 됨으로써 사회적 변화를 이끌었다. 또한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승동교회의 위치가 특별했다는 것이다. YMCA, 태화관, 중앙감리교회, 천도교의 중앙회관, 탑골공원 등이 지척에 있다. 이것은 단순히 지리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3.1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해서 특별하다는 의미다. 열거한 기관이나 장소가 모두 3.1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한 것이라면 승동교회도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은 3.1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해서 승동교회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다. 

그러나 승동교회 예배당으로 들어가기 위한 계단 옆에 작은 공간에 세워진 <3.1운동기념터>라고 하는 새김돌을 대하면서 생각하게 된다. 새김돌에 담겨진 설명에는 ‘삼일운동 거사를 위해 학생대표들이 모였던 곳’이라고 되어있다. 즉 일반적으로 태화관, 천도교 중앙회관, 탑골공원, YMCA 등을 3.1독립운동의 발상지 내지는 현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반면에 승동교회는 그렇게 기억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승동교회 예배당 입구에 세워진 새김돌은 이곳이 3.1독립만세운동의 거사를 모의했고 전개한 곳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곳이 3.1독립만세운동의 중심지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만세운동의 실제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학생들의 모의 장소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주변의 다른 장소는 지도자들이 움직였던 곳이라면 이곳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모임이 있었고, 그들이 전국 각지로 선언서를 배송하고, 각지의 학생들을 이끄는 역할을 했지만 그들이 민족대표의 역할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이 교회의 청년회장이었던 김원벽이라는 이가 학생대표들과 함께 1919년 2월 20일 승동교회 기도실에 모여서 독립만세운동을 위한 계획을 하고, 학생지도자대회를 엶으로써 전국의 학생들을 결집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3.1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그들의 활약은 결정적인 역할이었다.

당시 전국의 학생대표들은 학생들이 주체가 되는 독립운동을 계획했고, 학생들이 결집해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결의를 했다. 하지만 다시 승동교회에 모인 학생대표들은 학생들만이 주도하는 독립운동이 아니라 범민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좋겠다는 뜻을 모아서 준비했던 문서를 폐기하고 학생들만의 운동이 아니라 민족적 일치를 보여줄 수 있는 조직을 갖춰서 전개할 때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으로 그러한 조직을 준비하도록 했다. 바로 그 현장이 이곳 승동교회다.

이 교회의 청년회장이면서 연희전문학교 학생이었던 김원벽은 YMCA의 간사였던 박희도의 주선으로 보성전문학교의 주익과 강기덕,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이용설 등 학생대표들이 만나서 천도교와 기독교 단체들이 뜻과 행동을 같이할 것을 제의하고 동의를 얻어 거국적, 전 민족적인 만세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게 했다. 실제로 민족대표로 일컬어지는 33인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부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이후 체포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3.1독립만세운동은 학생들의 조직에 의해서 움직였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선언서 전달이나 각 지방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선 것이 학생들이었다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곳에 모였던 학생대표들은 각각 자신의 학교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학생들이 앞장설 것을 결의했고, 각 지방에서 행동으로 보임으로써 민족적 만세운동으로 확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출발점에 승동교회라고 하는 공간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돌아본다면 인사동에서의 또 다른 여정이 될 것이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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