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에서 마주한 3·1독립만세운동의 흔적과 빈자리
탑골공원(종로2가동 38-1) ②
공원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지금과 같이 근사하게 조성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나무를 심었고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벤치를 설치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마저도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은 조선군 군악대가 1900년에 조직되면서 1902년 공원 한 쪽에 군악대 건물이 자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을사늑약이 일본에 의해서 강제로 체결된 후 1907년 조선군 군악대가 해산되면서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1913년에 이르러서 일제가 공원으로 만들면서 현재의 탑골공원의 형태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일제는 1919년에 이곳에 경성도서관을 지어서 근대식 도서관을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현재 그 도서관은 1967년 사직공원 옆으로 건물을 마련해 옮기면서 공간이 확보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공원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공원 명칭에 대한 견해도 여럿이지만 이 공원을 제안했던 영국인 브라운이 탑이 있는 공원이라고 해서 파고다 공원(Pagoda Park)이라고 부르는 데서 유래한다는 설이 유력한 것 같다. 따라서 파고다공원으로 불리던 것이 같은 의미의 우리말 명칭인 탑골공원으로 바뀐 것은 1991년이다. 그리고 다시 2011년에 와서 서울탑골공원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탑골공원을 찾게 되면 그곳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본래 그곳이 절터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원각사지 10층 석탑(국보 2호)이다. 또한 보물 3호인 원각사비가 있다. 우리 국민들 대부분이 국보 1호(숭례문)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만 2호, 3호를 아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국보 2호와 3호가 이곳 탑골공원에 있다. 그렇다고 단지 국보를 보자고 이곳을 찾은 것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3.1독립만세운동의 발상지이면서 그곳에 세워진 특별한 인물의 동상이 있기 때문이다.
3.1독립만세운동의 지도자인 손병희 선생의 동상(1966)과 만해 한용운의 기념비(1967)가 각각 세워져 있어서 찾는 이들로 하여금 그날의 함성과 근대사의 아픔을 느끼게 하며, 그러한 와중에도 앞장선 지도자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역사를 잇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이 남겨지는 것은 왜일까? 분명히 3.1독립만세운동의 주역은 기독교였고,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럼에도 이곳에는 기미년 만세운동의 지도자 33인 민족대표 가운데 2명만 참여했던 불교의 한용운을 기념하는 동상과 기념비 그리고 천도교의 손병희 동상은 있는데 정작 가장 많은 16명의 대표가 서명하고 전국적인 조직으로 만세운동을 확산시킨 기독교의 지도자와 관련한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기독교가 스스로 무관심한 데 원인이 있다는 생각이다. 없는 것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있는 역사조차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잊혀지거나 부정되는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은 현재의 사람들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공원을 돌아보게 된다.
이 공원은 일제 강점기에 맨손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며 조선이 자주독립국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외쳤던 곳이다. 하여 3.1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해서 만세운동의 전개과정과 일제의 탄압을 캡처한 형식으로 한 장면 한 장면을 부조로 만들어 1963년 공원 외곽에 설치한 것이 있었다. 또한 독립선언서 원본을 복사해서 구조물로 만들어 놓은 것과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이 있었다. 하지만 이 탑은 1992년에 해체해서 두었다가 현재는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이전해서 설치되었다. 원래의 자리에 있지 못하게 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처음에 세웠을 때의 의미와 뜻을 모았던 사람의 마음은 잊혀진 것이기에 아쉬운 마음이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