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최대로 계산해도 노벨상 수상자가 3명이다. 김대중과 한강이 있고 또 한 명은 출생지로 따질 때 추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1987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Charles J. Peterson은 우리나라 부산에서 출생한 사람이었다). 2025년 현재 노벨상 수상자 Top 10국가를 보면 ①미국(425-428), ②영국(144-145), ③독일(115-116), ④프랑스(78-79), ⑤스웨덴(34), ⑥일본(33), ⑦러시아(30-31), ⑧캐나다(29), ⑨스위스(27), ⑩오스트리아(25), 한국은 50위(2-3)로 돼 있다(수상자의 국적기준/출생지 기준/이중국적자/연구 소속기관 등으로 평가하는 데 따라 약간씩 다르게 된다). 그런데 한 가정에서 아버지, 어머니, 딸이 모두 노벨상 수상자가 나온 가정이 있다. 퀴리 가문이다. 마리 퀴리(Marie Curie/1867-1934)와 남편 피에르 퀴리(1895-1906)가 1898년 7월에 우라늄의 330배나 되는 방사능을 발견한 데 이어 같은 해 12월 26일에도 새로운 방사능 원소 ‘라듐’을 발견함으로써 우리 인류는 희망과 절망의 시대를 동시에 열게 되었다. 라듐은 광선(光線)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폴로늄은 마리 퀴리의 조국인 ‘폴란드’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라듐은 1932년 판매가 금지될 때까지 미국과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건강식품이었다. 미국식품의약국(FDA)도 라듐을 약이 아닌 자연 성분으로 분류해 아무런 규제를 가하지 않은 탓에 방사능 캔디나 방사능 크림 등으로 팔려나갔다. 퀴리 부부는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한 공로로 1903년에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프랑스 학술원이 노벨상 후보를 추천할 때 아내 마리 퀴리는 빼고 남편 피에르 퀴리만 추천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지면서 폴란드 여성이자 유대인이었던 그녀를 일부러 차별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퀴리 가문의 노벨상 인연은 그의 딸(이브 퀴리)에게까지 이어져 그가 받은 노벨 화학상(1911)까지 포함해 퀴리 家에서만 노벨상을 세 개나 받는 전무한 기록을 남겼다. 1906년 남편이 마차에 치여 세상을 떠난 후 마리 퀴리도 강한 방사선을 내는 동위원소들에 오랫동안 노출되면서 얻은 백혈병(재생 불가능 빈혈)으로 1934년에 숨졌다. 하지만 또 다른 영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죽은 지 61년만인 1995년에 파리의 팡테옹에 묻히게 된 것이다. 그곳은 장자크 루소,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등 프랑스를 빛낸 60여 명의 유해가 안치돼 있는 특별한 곳이다. 나폴레옹이나 드골 대통령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이곳에서 마리 퀴리가 영면하게 된 것이다. 아인슈타인도 “모든 저명인사 중에서 명성 때문에 부패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라며 퀴리를 추모했을 정도다. 사후에 이렇게 존경받는 사람이야말로 성공한 사람의 모습이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마리 퀴리를 찾아 왔다. 친구는 퀴리에게 영국 왕립 아카데미로부터 받은 금메달을 보여달라고 청했다. 그때 퀴리는 바닥에 앉아서 놀고 있는 어린 딸(이브 퀴리/뒤에 노벨상 수상자)을 가리켰다. 가까이 가보니 금메달이 딸 아이의 장난감이 되어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깜짝 놀란 친구가 물었다. “영국 왕립 아카데미로부터 금메달을 수상하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영예인데 어찌 아이들이 장난감으로 갖고 놀게 내버려 둘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퀴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영예라는 것은 장난감처럼 잠깐 가지고 놀 수 있을 뿐 그것을 영원히 손에 움켜쥐려고 하면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딸아이가 일찍부터 깨닫게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는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던 마리 퀴리가 고상한 품성과 과학에 헌신하는 마음을 자녀 교육에까지 고스란히 반영했을 뿐 아니라 가정 교육에서도 철저한 원칙을 세워두고 있음을 보여준 일화다. 그는 딸이 잘못을 저지르면 욕하거나 처벌하지 않았지만, 따끔하게 충고하는 법을 택했다. 한 번은 딸이 그에게 무례하게 행동하자 경고의 표시로 며칠 동안 단 한 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딸에게 자신의 잘못을 평생 잊을 수 없도록 확실히 각인시켜 주었다. 퀴리의 이렇듯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란 딸도 어머니를 이어 과학자가 되었고 노벨상까지 받게 되었다. 1911년 마리 퀴리가 단독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을 때엔 바르샤바 중학교 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프랑스어 선생님을 기억하고 그가 파리까지 올 수 있도록 상금의 일부를 교통비로 송금해 주기도 했다. 그는 물리학과 수학의 학위를 받고 1895년에 결혼해 부부 과학자로 성공한 것이다.
김형태 박사
<더드림교회•한남대 14-15대 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