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교회•신학교 재건 위한 이성휘 목사의 헌신
이성휘 목사는 이렇게 혼란한 정황에서 앞날을 내다보았다. 교회가 갈라지려는 아픔 속에서 그는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몸을 아끼지 않았다. 평양신학교 구역 내에 있는 이성휘 목사는 좌우에 치우치지 않는 격의 없는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래서 문제 수습을 위해 선봉장으로 활동하기에는 적격이었다. 그렇지만 해방 직후 한국교회의 상황은 통합보다는 분열을 향해 치닫고 있어서 이성휘 목사가 전적으로 노력을 했으나 어쩔 방도가 없었다.
1945년 12월 1일 북한 5도 연합 노회가 결성되면서 중요한 과제로 등장한 것이 신학교 운영이었다. 우선 신학교 운영은 연합 노회 직영으로 한다는 원칙은 쉽게 결의되었다.
그러나 실제 문제에서 교장 인선과 교수진 배정이 쉽지 않았다. 신학교 교장의 물망에 오른 사람은 이성휘 목사와 김인준 목사였다. 모두 다 교장으로서의 자질이 충분한 인물들이었다. 여기에도 자칫하면 경쟁이 일어나 양편이 대립하는 양상으로 표면화될 우려가 있었다.
해방 후 교회 노선의 향방을 하나로 조정하기 위해 만사에 원만함을 기하고자 동분서주하고 있던 그로서는 교장 자리 때문에 대결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이성휘 목사는 교장 경합에 나서지 않기로 마음을 굳히고 그 자리를 사양했다. 실로 그는 겸양의 미덕마저 갖추고 있었다. 이성휘 목사의 사양으로 신학교육의 중임은 김인준 목사에게 쉽게 부과되는 결정으로 귀착되었다. 긴장된 분위기는 화기가 넘치는 것으로 전환되어 그 뒤의 교수진 배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해방되던 그해 11월 14일부터 평북 선천에서 모였던 목사 수양회에서 조국의 해방을 감사하는 심령부흥회가 막을 내리자 북한 땅의 전 교회가 뭉쳐서 이북 5도 연합 노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이때 이 연합 노회가 몇 가지 중요한 안건을 토의한 끝에 교역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육을 재개할 것을 결의하고 교장으로 김인준 목사를 선임했다. 그는 감옥에 들어갈 만반의 준비를 하고 현직에 임했으나 올 것이 너무 일찍 왔다.
북한 공산당은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북한 지역에 있는 모든 기독교기관의 재산을 적산이라 해 가차없이 몰수했다. 그리하여 평양 신양리에 소재한 숭실학교의 웅장한 건물에는 북조선 공산당 본부라는 간판이 붙었고,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양촌의 집에는 김일성을 비롯해 공산당 간부들이 들어가 살림을 차렸다. 신학교 교문에는 최고 인민재판소라는 글이 새겨졌고, 붉은 완장을 두른 적위 대원이 총대를 메고 보초를 섰다.
평양신학교 건물이 공산당에게 압류되어 신학교로 사용이 불가능하게 되자, 바로 그 옆에 있는 마펫 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겨 수업을 진행했다. 이 건물은 마펫 선교사의 한국 성역 40주년을 기념해 1935년 평양의 교회를 중심으로 전국 교회가 헌금해 세웠기 때문에 적산이 아니었다.
이승하 목사
<해방교회 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