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이성휘 목사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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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 치하 속 신앙과 순교의 길

공산정권은 이것도 적산이라 하면서 압수해 버렸다. 그렇지만 신학교육은 계속해야 하겠기에 다시 그 밖에 있는 서문밖교회로 옮겨서 교회당 별관과 부속 건물을 임시교사로 사용하면서 수업을 계속했다.

김인준 교장을 검거해 문초한 후 일단 집으로 돌려보냈으나 1947년 1월 17일 소련군 특수부대가 연행해 시베리아로 유배시켜 마침내 순교했다. 기독교도 연맹을 조직하고 신학교를 어용 기관으로 삼으려는 공산정권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였다.

1947년 1월 20일부터 이성휘 목사가 교장직을 맡게 되었다. 평양장로회신학교가 1901년 창설된 이래로 제1대가 마펫 선교사, 2대가 라부열 선교사, 제3대가 채필근 목사, 그리고 5대가 이성휘 목사로 그가 평양에서의 마지막 신학교 교장이 되었다.

김광수 목사가 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1948년 가을이었다. 아버지 김희선 목사는 공산당에 의해 투옥되었고, 자신의 신변도 항상 감시가 뒤따라 마음 놓고 살 방도도 없었으려니와 생을 제대로 마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동생과 함께 며칠을 금식기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음성은 “너희는 성직자 가문에서 나지 않았느냐? 그들의 뒤를 계승하여 목사가 되어라. 죽고자 하는 자에게는 살길이 열리느니라”였다. 그의 할아버지도 초기 한국교회를 위해 일한 훌륭한 목사였다.

공산 치하에서 신학교에 간다는 것은 죽음과 다름이 없었다. 그래도 김광수 형제는 이성휘 교장을 찾아가서 신학교 입학을 허가해 달라고 간청했다. 인자하신 그분께서는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학기 도중인데 규칙에 없는 일이라 교수 회의를 열고 의논해 보겠다”고 했다. 며칠 후 이 교장은 만장일치로 입학이 허락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리하여 김광수는 동생과 함께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고, 육의 생명도 살고 영의 생명도 살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직을 수행하고 있다.

이성휘 목사의 아들인 이단열은 김광수와 일제 강점기에 광성중학교를 함께 다녔고, 북한 공산 치하의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함께 공부하기도 했는데 6·25 전쟁으로 소식이 끊겨 생사를 알 길이 없다.

김광수는 1년 반 동안 소위 서문밖교회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이성휘 목사로부터 특별히 이수한 학과는 천문학과 창세기였다. 그의 강의는 넓고 깊고 지적이면서도 영적이었으며 실로 오묘한 영감이 있었다. 녹음한 듯한 정확한 발음에다 물샐 틈 없는 다양한 변재로 진행되는 강의 시간은 벨이 울릴 때마다 매번 아쉬움으로 끝나곤 했다.

이성휘 목사가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교장이 된 것은 김인준 교장이 소련군 사령부에 연행된 후였다. 평양신학교 교수로는 최지화, 김태복, 이학봉, 박경구, 강문구, 김영윤, 김진수 목사 등이 있었다. 이분들은 공산당에 의해 순교했다.

이승하 목사

<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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