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정권 아래 순교한 신학교 교수들‧목회자들
교수 중 김태복 목사는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로 신약 주해와 공관복음, 그리고 헬라어를 가르쳤다. 그의 깨끗한 신앙생활은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기독교 신학교가 발족하면서 그는 행방불명되었는데 이는 공산당 정보기관에 연행되었기 때문이었다. 박경구 목사는 황해도 장연 서부교회를 담임 목회하면서 신학교에서는 로마서와 목회 서신을 강의했다. 특히 경건회 시간에 그의 불을 뿜는 듯한 열변의 설교는 학생들에게 순교의 신앙을 일으켰다. 강양욱이 찾아와 기독교도 연맹 가입을 권유했으나 단호히 거절해 박경구 목사는 해주 감옥에 투옥되어 고생하다가 1950년 9월 28일 살해되었다.
강문구 목사는 평양 창문밖교회를 목회하면서 신학교에서 조직신학 분야를 맡아 강의했다. 그는 신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다가 공산당에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서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윤 목사는 황해도 안악읍교회를 시무하고 있었다. 그는 신학교에서 바울서신을 가르쳤는데, 1950년 6월 24일 공산당 정보기관에 연행된 후 해주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이학봉 목사는 평양 남문밖교회를 담임하고 있었으며, 실천신학 분야를 교수했다. 그는 3·1절 기념 예배를 주동해 공산당 정보기관의 주목을 받았다. 결국 그 후 아무도 모르게 연행되어 행방불명되었다.
최지화 목사의 존재야말로 애매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일제 말엽에 평양노회 노회장으로 있으면서 신사참배 반대자인 주기철 목사의 목사직을 박탈하는 결의를 사회한 오점을 갖고 있었다.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교수하면서 교무과장을 맡고 있어 교장 다음가는 2인자였다.
그의 행동은 공산 치하에서도 왔다갔다해 누구에게도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도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날 밤에 공산당에게 연행되어 그 후 살해당했다.
감리교 신학교인 성화신학교는 38선 분단으로 서울에 있는 감리교 신학교에 진학할 길이 끊기자 북한에서 교역자 양성을 목적으로 1946년에 세워졌다. 성화신학교 교장은 배덕영 목사가 맡았고, 박대선 목사와 김용옥, 한승호 목사 등이 교수진을 수행했다.
교장인 배덕영 목사는 기독교도 연맹 평안남도 위원장을 맡으라는 강요를 거절해 공산당의 미움을 샀다. 1949년 12월 11일 신학교에서 심령부흥회를 열었을 때, 공산당 기관원이 강당 정면에 김일성의 사진을 걸라고 지시하자, “우리 신학교는 특수한 종교학교이다. 예수의 초상화 외에 다른 것을 걸지 않는다. 만약 당신네 정치학교에 예수의 사진을 걸라고 한다면 수령이 허락하겠는가?” 하면서 거절했다. 며칠이 지난 12월 16일 배덕영 목사는 연행되어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고, 1950년 10월 총살당했다.
이승하 목사
<해방교회 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