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남은 보아줄 수 있어도, 마마보이는 봐줄 수 없다!”고 한다. 어느 주부의 이런 처절한 외침은 농담이 아니다. 시어머니의 그림자에 가려 숨조차 쉬지 못하던 아내가 남편의 멱살을 잡고 던지는 절규다. 아내는 묻는다. “여보, 나야? 엄마야?” 이 질문 끝에 찍힌 물음표는 누가 더 좋은가를 묻는 한가한 질문이 아니다. 내 남편인지, 아니면 영원한 엄마의 아들인지 확실히 하라는 것이다.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대물림되는 이 기막힌 판박이 풍경을 보라. 평생 어머니 치마폭에 살던 아들이 엄마와 똑 닮은 신붓감을 데려왔다. 그때 아버지는 손사래를 치며 외쳤다. “얘야, 나는 평생 네 엄마 한 명만으로도 충분하다! 제발 복사판은 데려오지 마라!” 웃음이 나오지만, 공감하는 남편들이 있다.
요즘 ‘헬리콥터 맘’이란 말도 있다. 아들 주위를 뱅뱅 돌면서 관제탑 노릇을 한다. 하지만 안방에 가두고 물만 주면 자녀는 고작 ‘콩나물’이 될 뿐이다. 기특해 보여도 결국 남의 집 반찬거리에 불과하다. 자녀를 광야로 내던져라. 비바람을 맞고 뿌리를 내려야 비로소 야생의 ‘콩나무’로 자란다.
결혼은 탯줄을 두 번째 자르는 독립 선언이기도 하다. 마땅히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해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떠남은 거리의 문제가 아니다. 한 집에 살면서도 당당히 독립하는 자녀가 있는가 하면, 한국과 미국에 떨어져 살면서도 여전히 엄마 치마끈을 붙잡고 사는 이도 수두룩하다. 고부갈등의 본질은 시어머니의 극성만이 아니다. 떠나지 못한 아들의 우유부단함이다.
여기에 현대적인 ‘역(逆)삼강오륜’의 지혜가 필요하다. 부부 사이는 무엇보다 친밀해야 하고(부부유친),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엄연한 구별과 거리두기가 있어야 한다(부자유별). 부모가 자식 인생의 ‘사이(Between)’에 끼어드는 게 아니라, 한 걸음 물러나 ‘옆으로(Beside)’ 비켜서는 것이 이 시대의 참된 오륜이다. 자식은 내 소유가 아니라 잠시 맡겨진 손님이다.
자식 농사에도 AS 유효기간이 있다. 결혼 전까지는 정성껏 보살필 수 있다. 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부모의 AS 권한과 의무는 소멸한다.
이제는 그들 스스로 수리하고 관리하며 살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AS 할 일이 생겨도 본인들이 해결하게 비켜서라. 왜 부모가 공구 상자 들고 남의 집 가정사까지 뛰어들어 간섭하는가? 자녀로부터 떠나 자신의 삶을 멋지게 살아가는 ‘멋진 부부’가 되어라.
어머니는 그리워할 ‘고향’이지, 평생 머물 ‘정착지’가 아니다. 꽉 잡는 것보다 놓아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탯줄을 과감히 잘라야 자녀는 독립해서 설 수 있고, 부모는 비켜서서 자기의 삶을 살 수 있다. 자녀를 콩나물이 아닌 거대한 콩나무로 키워내는 독립, 그것이 행복한 가문의 시작이다. 자식을 콩나물로 키울 건가? 콩나무로 키울 건가?
두상달 장로
• 국내1호 부부 강사
• 사)가정문화원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