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가니니(Truganini)는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의 비극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유럽 식민 지배로 인해서 한 민족의 문화와 존재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과정을 고통스럽게 겪었다.
트루가니니는 1812년 무렵 태즈메이니아 브루니 섬(Bruny Island)에서 추장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10대 때 백인 정착민들에 의해서 가족을 모두 잃었다. 어머니는 고래잡이 선원들에게 살해당했고, 여동생도 납치를 당했다. 그녀를 강제로 배에 태우는 고래와 물개잡이 선원들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약혼자 파라나(Parauna)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무력으로 제압당하고 바다에 빠져 익사했다. 선원들에게 끌려간 그녀는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했다. 이 사건은 그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트루가니니는 1829년 브루니 섬에서 조지 오거스터스 로빈슨을 만났다.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영리하고 영향력 있는 원주민을 물색하던 로빈슨은 10대 후반의 트루가니니에게 주목했다. 여러 부족의 언어와 지리에 능통한 트루가니니는 영어를 빠르게 습득했다.
로빈슨은 태즈메이니아 식민 정부가 임명한 원주민 보호관이었다. 로빈슨은 영국에서 태어나 1824년에 태즈메이니아로 이주해서 건축업자로 성공했다. 그는 종교적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선교사로 전문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평신도 전도자로서 기독교 가치관을 원주민에게 전하려 했다. 원주민을 보호하려는 도덕적 사명감도 있었다. 그는 원주민들을 이주시켜 모아 살게 하고 기독교와 유럽 문화를 교육하는 ‘친화적 미션(friendly mission)’을 추진했다.
로빈슨은 트루가니니를 앞세워서 숲속에 숨어서 저항하는 원주민들을 설득했다. 로빈슨은 원주민의 안전과 식량을 약속했다. 트루가니니도 백인 선원들이나 범죄자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태즈메이니아 전역의 원주민 부족을 찾아 나선 로빈슨을 위해서 트루가니니는 안내자 겸 통역자가 되었다.
두 사람 일행은 ‘친화적 미션’을 위해서 1830년부터 34년까지 태즈메이니아를 횡단했다. 백인 정착민과 원주민 간의 ‘검은 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모험이었다. 거친 산맥과 빽빽한 온대 우림, 급류가 흐르는 강을 건너며 섬의 북서부와 서해안 등 험지를 누볐다. 트루가니니는 길도 없는 험난한 야생에서 일행을 인도했다. 낯선 부족을 만나면 앞장서서 설득했다. 1832년 아서 강에서 호전적인 부족의 공격을 받은 로빈슨의 생명을 구하기도 했다. 그녀는 탁월한 보호자이자 실재적인 중재자였다.
하지만 결과는 트루가니니가 생각하던 것과 달랐다. 1833년 200여 명이 로빈슨을 따라서 이주한 플린더스 섬의 위발레나 수용소 환경은 험악했다. 바람이 거세고 땅이 척박해서 농사가 불가능했다. 배급 식량의 질도 낮고, 깨끗한 물도 부족했다. 위발레나는 원주민 언어로 ‘검은 남자의 집’을 뜻하지만, 감옥과 다를 바 없었다. 수용소를 관리하는 로빈슨은 원주민의 전통 관습, 언어, 종교를 금지했다. 유럽식 의복을 입히고, 기독교 교리를 강요했다. 이름도 영어식으로 바꾸게 했다. 트루가니니는 생존을 위해서 실용적인 협력을 선택했지만, 로빈슨은 그녀를 이용한 뒤 배신했다.
원주민들은 극심한 향수병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해변에 앉아서 바다 너머 고향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문화 말살과 정신적인 고통에 더해서 질병이 원주민을 덮쳤다. 유럽인이 들여온 인플루엔자, 폐렴 등의 감염병으로 쓰러졌다. 1847년이 되자 불과 이주 원주민은 47명으로 급감했다. 위발레나의 생활은 사실상 서서히 진행하는 죽음과 같았다.
변창배 목사
<전 총회 사무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