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거스터스 로빈슨(George Augustus Robinson, 1791-1866)은 태즈메이니아 원주민과 백인 정착민 간의 블랙 워를 종식시켰다는 명성을 얻었다. 트루가니니는 브루니 섬의 족장 딸로 성장하며 익힌 언어와 밀림 속 생존능력, 협상술을 활용해서 로빈슨의 ‘친화적 미션’에 가이드이자 통역자로 협력했다.
로빈슨은 원주민을 투항시켜 무력 충돌을 종식시켰다는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는 당시 영국 사회에서 인도주의적 영웅이자 ‘원주민의 구원자’로 행세했다. 태즈메이니아에 이어서 빅토리아 원주민 보호관에 임명되었다.
로빈슨이 받은 대가는 막대했다. 정부로부터 급여, 보너스, 현금 보상, 대중 모금으로 마련한 선물, 그리고 자신과 아들들을 위한 토지까지 받았다. 포상금은 1천 파운드로, 한화 3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태즈메이니아 주지사로부터 약 313만 평에 해당하는 2천560에이커의 토지를 받았다. 여의도 면적의 3.6배, 국제 규격 축구장 1천450개가 들어가는 광활한 면적이다. 그는 원주민 보호관으로 20년 동안 연 500파운드, 한화 1억 5천만 원의 연봉도 받았다.
로빈슨은 1849년 원주민 보호관직이 폐지된 뒤 1852년 자산을 정리해서 영국으로 돌아갔다. 영국 고급 휴양지 바스(Bath)의 대저택에 정착하기 전에 부를 과시하며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 전역을 여행했다. 그는 식민지 정부의 경력을 인정받아 연금을 받았다.
로빈슨은 원주민들로부터 수집 혹은 약탈한 유물과 기록을 가져가서, 자신의 업적을 홍보하고 문화적 명성을 유지했다. 사후에는 ‘인도주의자’라는 비석을 세우고 바스의 상류층 묘지에 안치되었다. 로빈슨은 트루가니니의 헌신을 발판 삼아서 영국 상류층의 꿈을 이루었다.
반면 트루가니니는 종족의 멸망과 사후 모욕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받았다. 로빈슨이 약속한 안전한 안식처는 존재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생존 수단 외에 어떤 대가도 없었다. 심지어 로빈슨은 제공한 보트도 다른 이에게 임대해서 수익을 챙겼다. 언어와 문화를 박탈당하고, 자신들의 토지로부터 추방당했다. 마침내 종족이 전멸하는 비극을 겪었다. 트루가니니에게 돌아간 것은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의 마지막 생존자’라는 슬픈 칭호뿐이었다.
1970년대 이후 호주는 역사 재평가를 진행했다. 로빈슨은 ‘기만적인 식민주의자’로 도덕적 단죄를 받았다. 역사가들은 로빈슨의 일기와 기록을 분석해서 명예와 부를 위해서 원주민을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보호는 구실이고, 친화적 미션은 명분에 불과했다. 플린더스 섬 위발레나 수용소는 사실상 집단 폐사지였다. 로빈슨에게 제노사이드 공범이며, 원주민 멸절의 행정 집행자라는 도덕적 낙인이 찍혔다.
현재 ‘멸종된 인종’으로 치부되던 팔라와 원주민 후손 수천 명이 정체성을 지키며 살고 있다. 대개 백인 정착민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으로, 위발레나의 비극을 기억하며 언어와 문화 복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76년 호주 정부는 트루가니니 유골을 원주민 공동체에 반환했다. 로빈슨의 일기와 수집 유물도 법적 권리를 박탈해서, 태즈메이니아 박물관과 도서관 등 공공기관으로 귀속했다. 1995년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토지법’으로 위발레나 수용소가 있던 플린더스 섬 일부와 주요 유적지를 원주민 공동체에 반환했다. 2006년 태즈메이니아 주정부는 과거사에 사과하고 호주 최초로 원주민 후손을 위한 보상법을 통해 강제 이주 및 격리 정책 피해 후손에게 보상금을 지급했다.
변창배 목사
<전 총회 사무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