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위량의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 (50)
대구에서 구미까지 (8)
필자는 대구에서 중학교 때부터 1981년 신학교 입학할 때까지 살았다. 신학교 입학 후부터는 서울, 강원, 부산, 오스트리아, 독일, 한국의 수도권 등지에서 살았다. 30년 가까이 타지에 살다가 2008년도부터 다시 대구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대구에서 구미까지 기차나 버스를 타고 지나간 적은 여러 번 있지만, 걸어서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배위량이란 걸출한 분이 나를 생전 가 보지 못한 길을 걷도록 충돌질했고 그것도 첫걸음을 너무너무 추운 날 걷도록 했다. 당시에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몸이었던지라, 배위량이 걸었던 길을 찾고 걸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그것에 대한 당위성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생전 가 보지 않았던 길을 찾고 걷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요행히 얻을 수 있었던 날이 영하 20도의 강추위가 몰아붙인 날이었다. 추웠지만, 모처럼 잡은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집을 나섰지만 추운 날은 역시 힘들었다.
생전 가보지 못했던 길을 걸을 때는 우선 길을 모르니, 물으면서 가든지 아니면 지도를 보고 찾아 가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길 안내자를 데리고 가야 한다. 이 세 개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면서 길을 가게 된다. 어느 누구도 두 걸음씩 걷지 못하기에 모든 사람은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걷게 된다. 이렇게 한 걸음씩 걷다 보면 사람도 보이고 집도 보이고 길가에 함초롬히 피어난 민들레 쑥부쟁이 꽃도 보인다. 길가에 우뚝 서 있는 소나무와 참나무 전나무 오리나무 때죽나무, 단풍나무 은행나무도 눈에 들어오고 길가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개미 행렬도 보이고 부지런히 꿀을 달고 붕붕 날아다니는 일벌도 눈에 들어온다. 걸음을 두 걸음씩 걷지 못하고 한 걸음씩 걸어야 하는 인간은 아무리 머리가 총명하고 뛰어난 인간이라고 해도 한계 속에서 살아가는 피조물이란 것에 모두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신이 깨닫든지 아니면 일부러 모른채 하든지 아무튼 모든 인간은 한계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살다간다.
조선 시대와 근대 초까지 대구는 영남지역의 중심이었고 영남지역을 통괄하는 행정부가 위치했던 행정 중심 도시였다. 지금도 대구는 교육과 의료 상업의 중심 도시로 이 지역에서 감당하는 역할이 큰 도시에다 구미는 한국이 현대화 하는 과정에서 산업화를 선도한 도시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대구와 구미 사이에는 철로가 있고 하루에도 수십 번 왕래하는 고속버스가 있어 구미 공단에서 일하는 많은 노동자들이 대구에서 구미까지 출퇴근을 했다. 최근에는 구미 공단이 불경기를 맞아 출퇴근하는 사람이 많이 줄어 고속버스는 뜸하게 다닌다. 그런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가 맹위를 떨치는 요즈음은 어디나 할 것 없이 교통이 많이 제한되고 있다.
기차를 이용하고 버스를 이용하여 여행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자신이 가보고 싶은 곳으로 찾아가 여러 곳을 둘러보고 그곳에서 맛있는 특산물을 먹고 하면서 인간은 살아가는 재미를 느낀다. 그런데 어려운 일이지만, 자신이 가보고 싶은 곳으로 조금 시간이 더 든다 해도 한번 걸어가 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유의미한 일인데도 그것이 쉽지 않기에 사람들은 근처로만 다니면서 운동 삼아 걷는 일은 즐기면서도 먼 거리를 걷는 것에는 많이 주저한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일상의 삶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인간은 원래 걷는 존재로 만들어졌다. 걷고 달리고 하는 존재이기에 인간은 쉬임 없이 걷고 달려왔다. 그렇기에 걷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슨 질병이든지 찾아온다.
어느 정도까지 걸어야 되는 지에 대해서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지만, 문제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걷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 요즈음은 걷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많은 교통 수단이 생겨났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든지 자가용을 이용하여 이동한다. 인간이 자신의 먼 미래에 대한 예측은 하지 못하지만, 오늘 먹은 아침밥이 자신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는 대충 알고 있다. 가령 먹을 밥이 없어 물만 한잔 먹고 출근한 사람은 허기져 힘든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너무 많은 밥을 먹은 사람은 그 음식 때문에 속이 부대껴 열심히 일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마태복음 16장 3절에 보면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다. 인간이 눈앞에 있는 일은 잘 알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잊고 살아가는 데 대한 예수의 책망을 읽으면서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의 말씀이 눈앞의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눈앞의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천적인 소중한 것을 잊지 말 것에 대한 경고이다. 누구나 너무 눈앞의 것에 매달리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마는 일이 허다하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바쁜 걸음을 걷다보면 멀리 보지 못하고 눈앞의 것만 보게 되어 놓치는 것이 많다.
걷는다는 것은 바쁜 일상에서 탈피하여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그 길을 다시 생각하고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는 것까지 포함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뛰는 것은 단거리 인생, 개별 예술에 해당되지만, 걷는 것은 장거리 인생, 종합예술에 해당되는 것 같다. 걸으면서 시를 중얼중얼 읊기도 하고 머리 속으로 그림을 구상하고 지나온 과거를 되뇌이기도 한다. 아무튼 걷는다는 것은 종합예술인 것 같다. 다른 한편 걷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고, 타인과의 경쟁이면서 동시에 협력이고 함께 함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걷는다는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 같다. 그렇다면 배위량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속에서 걸으면서 사람을 만나고 잠을 자고 음식을 먹고 새로운 길을 찾아 자신의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다.
대구에서 구미까지 여러 번 걸었지만, 걸을 때마다 새롭고 의미 있었고 감사와 감격이었다. 그런 감정은 대구에서 구미까지 걷는 길이 아름답다는 말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필자에게 그 길은 추위와의 싸움이었고 배고픔과 무더위와의 싸움이었고 외로움과의 투쟁이었다. 하지만 그 길은 감사와 감격이었고 가슴 벅찬 환희의 순간이었다. 필자가 여기 서술한 것만 읽어도 독자들은 복잡다난한 인간의 여러 단면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느낌은 필자만의 것이 아니다. 필자는 이 길을 여러 번 걸으면서 다른 사람과 함께 걷기도 했다. 이 길이 어떤 이들에게는 감격이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고통이 됨을 눈으로 보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똑같은 대상(對象)이 만(萬) 가지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함께 걸으면서도 동일한 목적지에 도착하면 함께 환호하고 즐기는 것이었다. 해냈다는 성취감에 함께 들떠서 기뻐하고 가져온 작은 누룽지라도 함께 나누는 만찬은 감격이었고 즐거움이며 기쁨이었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