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303) 소다 가이치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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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다 가이치의 부인 우에노 다끼는 서울에서 고아원을 계속 운영했다. 사랑하는 한국의 고아들을 그냥 두고 고국으로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다는 1947년 10월 13일 서울에서 부인을 잠깐 만났다. 그때 우에노 다끼 여사는 건강 악화로 일본으로 귀환할 수 없었으며, 또한 고아들을 그대로 두고 갈 수 없다고 하였다. 소다 옹은 ‘神恩主愛以何酬 歲月空過暎白頭一片壯心猶未滅秋風萬里試東遊(하나님과 주님의 은혜 어찌 다 갚으리오. 세월만 허송하여 백발이 성성한데 사나이의 일편장심 아직도 남아 있거늘 어찌하여 나는 동쪽나라(일본)로 여행을 가야 하는가’라는 詩 한 수를 남기고 아내 우에노 여사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서약했다. 1. 우리 부부는 과거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한다.

2. 어떠한 재난이 닥쳐오더라도 십자가를 우러러보며 마음의 평화를 간직한다. 

3. 하나님의 가호를 빌며 살다가 일후 천국에서 만난다. 

부인과 헤어진 후 부산까지 걸어서 갔다. 미군 배를 얻어 타고 11월 일본 땅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조국에 전하기 위함이었다. 부끄러운 자신의 조국이지만 고난에 처해 있는 모습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희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일본으로 향하였다.

이때 소다의 심정은 사도 바울의 것과 같았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2) 그러므로 마지막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철수할 때 민족과 함께 조국으로 갔다. 

소다의 부인 우에노는 1878년 일본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했다. 나가사키(長岐) 기독교학교를 졸업하고 1898년 來韓하여 日新 小學校 교사로 봉직했다. 1908년 30세에 41세의 소다와 결혼했다. 숙명여학교와 이화여학교의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1926년 퇴직하여 가마쿠라 보육원에서 남편을 도와 보모가 되었다. 1943년 소다가 원산에서 전도사로 사역할 때에는 서울에서 혼자 고아원을 운영하였다. 1945년 해방 후 귀국하지 않고 계속 고아원을 지켰다. 우에노는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1950년 1월 14일 74세로 별세하여 남편 보다 먼저 양화진 제1 묘역에 안장되었다. 

일본에 도착한 소다는 한 손에 <세계평화>라는 표어를 들고 또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전국을 다니며 조국 일본의 회개를 부르짖었다. “회개의 눈물로 다시 희망을 세워가자!”고 외치며 전쟁과 원자탄이 없는 세계평화를 주장했다. 이는 그가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이 나라가 패망할 때 ‘성령운동’이 일어났다. 나라를 잃은 것이 우리의 죄라고 믿고 회개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배웠다. 일본이 망했을 때 회개의 눈물로 다시 희망으로 일어나자는 외침이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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