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청년운동, 복음전도로 시대를 이끈 게일
게일 ② (James Scarth Gale)
1900년 그가 연동교회 담임으로 부임할 때 연동교회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였다. 북장로교회 선교부 소속 무어(S.F. Moore) 선교사가 종로에서 전도하면서 소수의 결신자를 얻었고, 이어서 리(Graharm Lee) 선교사가 서상륜과 함께 연지동 136-17에 있는 초가에서 예배를 드린 것을 시점으로 해 연동에 공동체가 생겼다. 이 공동체의 첫 담임자로 온 것이 게일이었다.
그가 서울로 오자 고종 황제는 자신의 고문역을 맡아줄 것을 요청함으로써 그는 목사로서만이 아니라 한 나라의 통치자가 필요로 하는 판단과 정보를 나눌 수 있는 대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1900년부터 무려 16년 동안 영국왕립학회 조선지부를 창설해 지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을 세계에 알리는 일을 했다.
뿐만 아니라 북장로교회 선교부 본부가 있는 연동에 자리하고 있는 연동교회를 목회한다는 것은 단지 한 교회만이 아니라 사실상 북장로교회 선교부 전체가 감당해야 하는 일들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는 것이었다. 즉 연동교회 담임으로 연동여학교(후에 정신여학교로 발전)와 예수교학교(후에 경신학교로 발전)를 관리하면서 학교로 세워가는 일을 했다. 이 학교들은 모두 정동에 있을 때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서 시작된 학교다. 그러나 이 학교들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역사를 잇지 못하고 일시적으로 폐쇄도 되고, 학교 이름도 맡아서 일하는 선교사들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두 학교가 북장로교회 선교부가 이곳 연동으로 나와 자리를 잡으면서 비로소 학교로서 정착, 발전하게 되는데 그 역할을 감당한 것이 게일이다. 게일은 이 교회에 부임해서 1901년 남자학교(경신), 1902년 여자학교(정신)를 정식으로 설립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 YMCA는 1904년 출옥한 이상재를 중심으로 민족중흥을 열어갈 수 있도록 청년들의 의식을 깨우는 역할을 함으로써 조선의 청년들에게 미래를 꿈꾸게 했다.
1904년 곧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던 독립협회 회원들이 러일전쟁으로 인해서 출옥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찾은 것도 게일 선교사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감옥에 있는 동안 게일이 꾸준히 면회를 가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게일은 출옥 후 그를 찾아온 독립협회 회원들과 개종한 관료들을 중심으로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일을 했다.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교육협회’를 창립해서 기독교 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민족의 의식을 깨우치는 일을 이끌었다. 후에 이 기독교교육협회는 한국 교회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교양과 신앙을 깨우쳐주는 기능을 감당했다.
그의 결혼 생활은 길지 않았다. 결혼 16년째 되던 해인 1908년 3월 결핵병으로 부인 헤리어트를 잃었다. 부인이 별세한지 불과 6개월이 지난 후 제2회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립노회에서 노회장으로 선출되었고, 평양신학교 교수로도 선임이 되어서 그의 역할에 많은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1909년에는 ‘예수교회보’ 주필을 맡아서 교계소식을 전하고 나누는 일을 감당했다. 다른 정보공유가 거의 불가능하던 시대에 그의 역할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더했다.
그가 연동교회에 부임해서 교회는 이 지역만이 아니라 서울 장안에 중심이라고 할 만큼 각계각층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많은 일들이 진행되었다. 그 중에서도 종로 2가에 있는 승동교회가 겪었던 일과 비슷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연동교회가 천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고, 게일 선교사의 조사로 일생을 함께한 역시 천민출신 고찬익과 이명혁에 이어서 이번에는 광대 출신 임공진을 장로로 세우는 과정에서 양반 신자들의 반발을 크게 사게 되면서 교회가 분란이 일어났고, 결국 1907년과 1908년에 걸쳐서 연동교회를 형성하고 있던 천민과 양반들이 분열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 양반들은 묘동교회로 이탈하게 되었다. 게일은 이러한 상황을 이끌면서 한국 교회가 신분을 극복하는 일에 앞장서는 교회로 그 위치를 다졌다.
그 하나만으로도 기독교가 조선을 깨우는 일에 큰 역할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게일은 이 교회의 담임으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착안하고 이끌었다. 그리고 1909년 한국 교회가 독자적으로 준비했던 ‘100만인구령운동’의 실행위원장을 맡아 한국인에 의한 복음전도를 일깨워주었다. 게일은 27년간 이 교회의 담임 목사의 신분을 가지고 한국 교회를 세우고, 이 나라를 깨우는 역할을 감당했다. 1916년부터 천민출신 장로 이명혁이 연동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자 동사목사로 동역하다가 1919년 그에게 당회장을 넘기고, 그 자신은 그가 해오던 또 다른 일들에 집중하다가 1927년 완전히 조선을 떠나 고향인 영국으로 갔다. 연동교회는 그를 송별하는 모임을 6월 11일 열었다. 그는 조선을 위한 큰 별이었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