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가니니는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보호관 로빈슨의 ‘친화적 미션’에 협력했으나 로빈슨의 종교적 신념에 동의했다고 보기 어렵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보다 부족의 생존을 위한 실용적인 선택이었다.
트루가니니는 백인들의 무차별 사냥으로 동족들이 몰살당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블랙 라인 사건의 공포도 경험했다. 로빈슨이 안전을 약속하고 원주민의 플린더스 섬 이주를 추진하자 팔라와(Palawa) 부족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생존의 길로 보았다.
로빈슨은 와이발레나 수용소에 거주하는 원주민을 유럽식으로 ‘문명화’하려 했다. 유럽식 옷을 입히고 기독교 교육을 실시했다. 기독교 신앙도 강제했다. 이름도 영어식으로 바꿔 부르고, 영어 사용을 강요했다. 원주민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격리해서 호바트의 학교로 보내는 강제 분리 정책도 병행했다.
하지만 트루가니니는 평생 자신의 전통 이름과 정체성을 잊지 않았다. 외면적으로 로빈슨의 문명화 교육을 따랐으나 실제로는 백인 사회의 생리를 파악해서 동족을 보호하는 중재자 역할에 집중했다. 트루가니니는 로빈슨이 친화적 미션을 추진해 명성을 얻은 뒤 약속을 지키지 않자 회의에 빠졌다. 동족들이 열악한 환경으로 고통당하고 전염병으로 죽어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자 배신감을 느꼈다.
1841년에 로빈슨이 태즈메이니아로부터 멜번으로 활동 반경을 넓혔다. 멜번 지역의 원주민에게 친화적 미션을 추진해서 명성을 높이려는 의도였다. 그해 10월에 트루가니니를 포함한 5명의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은 로빈슨의 보호구역을 탈출해서 웨스트 포트 지역에서 저항했다. 이들은 백인 정착민에 저항하며 무장 투쟁을 벌였다. 백인들이 친구 래클리를 죽이고 성폭력과 가혹한 처사를 일삼자 보복과 식량 확보를 위해서 저항에 나섰다. 농장을 습격하고, 포경업자 겸 물개 사냥꾼인 윌리엄 쿡과 양키를 살해했다.
트루가니니는 남편인 몰보이너와 동료들과 함께 약 8주간 동안 게릴라식 저항에 적극 참여했다. 백인 정착민을 습격할 때 트루가니니는 백인 여성과 아이들을 숲으로 피신시키거나 안전한 곳으로 안내하기도 했다. 무분별한 살상을 피하려는 의도였다. 이들은 군대와 경찰의 추격 끝에 파울렛 강 인근에서 체포되었다.
이들은 그해 12월에 멜번에서 재판을 받고 터너미너웨이트와 몰보이너는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배심원단은 관용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1842년 1월 20일 두 명을 멜번에서 공개 교수형에 처했다. 트루가니니를 포함한 여성 3명은 무죄 판결을 받고 플린더스 섬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빅토리아 최초의 공개 교수형으로 식민지 역사상 중요한 사법적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호주 개척기 원주민의 저항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2016년에 멜번 시의회는 브룩 앤드류와 트렌트 월터 두 예술가에게 의뢰해서 두 사람이 처형당한 장소에 기념비를 건립했다. 호주 주요 도시 중에 최초로 개척지 전쟁(Frontier Wars)과 원주민 저항을 공식 인정한 기념물이다. 범죄자로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지만, 생존을 위한 자유의 투사였다고 재정의하고 식민 지배의 폭력성을 인정한 것이다.
시의회는 기념비 앞에 추모 정원을 조성해서 태즈메이니아와 멜번 지역의 토착 약용 식물들을 심었다. 치유를 상징하는 정원에는 해마다 1월 20일에는 기념비 앞에서 이들과 희생당한 수십 만 명의 원주민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열린다.
변창배 목사
<전 총회 사무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