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내 길의 한 줄기 빛 이만영 장로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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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터전인 도림교회(6)

– 도림동과 영등포

1919년에는 기관차, 화차, 객차를 만드는 용산공작소가 이곳에 들어섰다. 1930년에는 영등포 역전에서 도림천까지를 잇는 신경인가도의 도로폭을 24m로 확장하였다. 1933년에는 모랫말 초입에 조선맥주회사(대일본맥주주식회사 삿포로: 하이트의 전신)가 설립되었고, 이어 기린맥주회사(OB의전신)가 영등포역 뒤에 공장을 세우고 1934년 1월부터 맥주를 제조했다.
1917년 10월 7일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첫 번째 한강 인도교가 준공된 이후 1936년 10월 23일에는 중앙에 복선의 전차 궤도와 양측에 인도 및 차도가 놓인 한강 인도교 신교가 준공되어 이 일대를 중심으로 교통의 요지로 변모했다. 이에 공장지대로서의 변화에 가속을 붙여 1935년에는 종연방직과 동양방직회사가 들어섰고 1941년에는 방직회사와 염색공장 등에서 일하는 일본인 감독과 기술자, 사무원 등이 거주할 주택단지가 건설되었다.
1939년 8월에는 영등포 공업지역 토지분양조합이 결성되어 모두 32만 평이 매각되었고 이곳에 창화공업, 경성염직, 조선제분 등이 건설되었다. 이 공장들은 대부분 일본인 소유였으며 노동력은 조선 사람들이 제공했다.
따라서 1930년대 이 지역의 인구는 급증하였다. 이에 1936년 4월 1일 영등포 출장소가 개설되면서 도림리가 도림정으로 변경되었고, 1943년에는 영등포 출장소가 영등포구로 승격되었다. 해방 후 1946년 10월 1일에는 도림정의 이름이 도림동으로 바뀌었고,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59호에 의거하여 경기도 시흥군 동면에 속해 있던 지역 일부가 추가로 편입되어 지금의 서울시 영등포구 도림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도림교회의 설립과 성장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도림교회는 1926년 모랫말에 사는 영등포교회 교인 몇 가정이 기도회로 모이면서 시작되었다. 조그만 기도처로 예배당이 시작된 1926년의 모랫말은 영등포 외곽지대의 한적한 시골이었다. 영등포교회는 김상옥, 손선달, 허학서 등이 주동이 되어 언더우드가 세운 새문안교회의 지교회로 1903년에 설립되었다.
1926년에 영등포교회의 지교회로 시작된 모랫말의 사촌교회는 영등포 지역에서 1906년 설립된 노량진교회와 1907년 설립된 양평리교회에 이어 네 번째로 설립된 장로교회였다.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를 모태로 영등포교회가 설립되었고, 또한 영등포교회를 모태로 사촌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사촌교회는 1929년 8칸짜리 목조건물의 예배당을 짓고 교회를 중심으로 지역 사회를섬기는 교회로서의 본격적인 행보를 내딛게 되었다. 그리고 1930년 1월 30일 영등포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분립하여 더 이상 지교회가 아닌 당당한 독립교회로 출범하였다. 그러나 1942년까지 정식 담임목사 없이 임시당회장, 임시목사, 조사 또는 전도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평교인들끼리 교회를 이끌어 나갔다.
그렇지만 이 시기인 1930년대 중반부터 사촌교회 인근에 들어선 크고 작은 수많은 공장과 회사들로 인해서 사촌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젊은 청소년들이 모이는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이들을 위한 새로운 교육의 장을 열어가게 되었다. 성경과 찬송가를 배우는 것은 물론이고 동요와 유희도 배웠고, 팀을 구성하여 축구와 럭비 같은 운동도 했다. 토론회와 웅변대회를 통해 많은 청소년들이 새로운 도전을 받았고 가정 형편으로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이들에게는 한글과 산술을 배울 수 있는 장소였다.
사촌교회는 이때부터 지역사회에 오락, 체육, 교양, 교육의 공간을 만들어 나가게 되었다. 또한 야학을 설치하여 동네 사람들에게 학교 교육과정에 준하는 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역사회의 주민들을 위한 교회의 역할은 지금까지 내려오는 도림교회의 전통이 되었다.
1938년 가을에는 서교정교회를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전개하던 김영한 장로가 사촌교회의 교역자로 부임하였고 이때 교회의 명칭이 사촌교회에서 도림정교회로 바뀌었다. 도림리가 경기도 시흥군에서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모랫말의 행정구역이 도림정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교회의 명칭도 도림정교회로 바뀐 것이었다. 모랫말 도림정교회의 김영한 장로는 목사로 제직하면서 교인들과 힘을 다해 일제 말 일제의 모진 종교적 민족적 탄압에 맞서 끝까지 교회를 지켰다.

– 유병관 목사의 부임과 교회의 중흥

해방이 되어 도림정교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교회의 위치도 도림정 177번지에서 도림정 205번지로 이전하였다. 도림정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이주민들과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급증했다. 도림정교회의 식구들도 많아졌고 그만큼 도림정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도 증가하였다.
그런데 도림정교회는 새 예배당을 짓는 일로 큰 어려움을 겪는 과정에서 김영한 목사가 사퇴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당시 당산동교회에서 사역하던 유병관 목사가 도림정교회를 맡게 되었다. 당시 36세의 젊은 목사 유병관은 도림정교회를 맡아 1947년 3월 부터 27년간 도림교회에서 사역하였다.
유병관 목사는 도림정교회에 부임하여 새 예배당을 완성하였고 교회를 안정시켰다. 모랫말 언덕 위에 세워진 벽돌 예배당에는 새로운 이주민들이 대거 참석하였는데 이들은 일본 사람들이 살았던 주택단지와 큰 공장의 사택 등 빈집이 많았고 일본 사람들이 떠난 공장에 새로운 일자리가 많이 창출되었기 때문에 이곳으로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특히 북에서 남하한 이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도림교회의 한 축이 되었다.
당시 먼 곳에서도 쉽게 눈에 보이는 모랫말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던 도림교회는 수많은 이주민들에게 위로와 평화를 제공하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렇게 도림교회는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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